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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안 승 우 (安 承 禹) (1865 - 1896. 6) 호(號) : 하사(下沙) 자(字) : 계 현 (땅賢) 안승우(安承禹) 선생의 본은 순흥(順興)으로서 문성공 안유(文成公 安 格)의 후예이다. 대대로 지평 상석리(低平 上石理)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학문 익히기를 좋아하여 성재 유중교(省濟 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대한 소식에 접하고 성재(省齊) 문하의 인 사들과 거사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동참하기로 한 서상열(徐相烈)이 선산(先山)에 이별을 고하러 고향 으로 돌아갔다가 11월 단발령이 내려져 길이 막혀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러나 제천(提川)에서 괴은 이춘영({鬼隱 李春永)이 거사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달려가서 11월 28일 의거의 기치를 내어 걸었다. 뒤이어 서상열이 동문인 이필희(李弼照) 등과 의거하여 제천으로 달려왔다. 한편 이춘영은 지평군수 맹영재(굶英在)의 포수 4백여 명과 김백선(金伯 善)을 얻어 왔다. 이에 1895년 12월 3일에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추 대하고, 서상열(徐相烈)을 군사로, 이춘영(李春永)을 중군으로, 안승우(安承 禹)는 군무도유사(軍務都有司)가 되어 군용을 정비하고 친일 매국 역 당의 앞잡이 장기렴(張基癡)의 군대 및 왜적의 무리와 혈전을 시작하였다. 첫 번 싸움은 단양 장회협(長雅뺏)에서 전개되었는데 이 전투에서 적에 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단양전투에서 크게 성공한 후 이춘영과 서상열은 남쪽으로 의진의 당면 과제인 소모활동을 하러 떠났다. 그리고 이민옥(李敏玉)도 그들을 따라가고 선생만이 제천의 본진에 있 는데 적군이 창졸지간에 쳐들어왔다. 그들과 대적하고자 할 때 남쪽에서 소모활동이 활발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적군이 모두 흩어졌다. 선생은 모산(毛山)에 사는 판서 섬상훈(沈相勳)을 찾아가 의진에 동참 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고 주천(패폈)에 이르러 모병하여 백여명 의 군사를 얻었다 1895년 12월 영월로 들어간 선생은 유인석(柳歡錫)에게 의진(義陣)의 대장이 되어줄 것을 청하여 대장소(大將所)의 일을 주재하고 의진의 구성 을 재편성하였는데 그 부서는 다음과 같았다. 12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