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page

전선을 구축하고 이인영의 부대가 1907년 11월 7-8일 양일간 안기영의 본가에서 2krn거리인 양동면 삼산리에서 일본군 혼성부대(보병 51연대 12 중대, 기 병 17연대 3중대 1개소대, 공병 13대 대 1개소대) 와 교전할 당시 안기영의 본가에서 숙식을 하며 의병진들의 참모들이 작전회의 등 사령부 로 사용하였으나 안기영의 참전여부는 기록에 없어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영국 데일리 미일리 기자가 당시 의병들의 참모습을 양평 지역에서 촬영 한 것으로 밝혀진 사진 중에 안기영의 모습과 같은 인물이 보이나 존영을 알 수 있는 분들은 타계하여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 1집 345면 -471면, 753변 -806면에 수록된 것을 보면 하사 안공 을미 창의사실(下沙 安公 ζ未 f昌義事實)을 전기 제천의 병진의 참모이며 하사(下沙) 동문인 박정수(朴貞洙)가 해서(階書)로 기록 한 것을 1906년 10월(음) 경에 선친 행적 기록이므로 찾아다가 일제치하 에서 조심스럽게 보관하다 후손에게 전하여 70여 년만에 국가 보훈처에 제출하여 독립운동사 자료집 1권에 수록케 함으로써 제천의병항쟁의 발단 과 진행과정 의병진의 최후의 상황을 후세에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게 하 는 등 의병항쟁에 직 · 간접으로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로 부터 항일 주요인물로 주목을 받으면서 선친 안승우의 스승이신 성재 유 중교(柳重敎)의 성재 문집을 목판으로 찍어 책으로 편찬하는 한편, 서당을 개설하여 항일정신과 충의대의를 고취시키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3월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안기영은 본향인 양동에서 항일운동의 계획을 수립하고 지휘하였으며, 제자 전석현은 체포되어 옥고 를 치루었다. 선생은 전임 면장의 아들인 유 00 가 일경에 밀고하여 순검 3명이 체포 하러 오는 도중 아래 동네 주민의 연락을 받고 뒷문으로 도주하여 서울로 피신하였는데, 그 때에 안기영의 모친 덕수 이씨와 삼촌(숙부) 안승문은 순검에게 연행되어 지평주재소에서 취조를 받다가 모친 덕수 이씨는 3일 만에 귀가하였고, 숙부 안승문은 삼개월 간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어 귀가 하였다. 그 후 1920년 8월 추석명절 귀가 도중 몸져누워 8월 15일 추석날 새벽 평생을 구국의 일념으로 항일운동에 전념하다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子) 안봉희(安鳳熙) , 자부(子歸) 이인교 m.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