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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국 각처에서 의분을 이기지 못하여 항일 결의를 하였다. 제천 의병진에서 유격장을 역임한 운강 이강년(李康季)이 다시 의병을 일으킬 것을 고심하던 중, 제천의병의 발생지인 지평 Oi~平)에 가면 포수 및 충의지사가 많다는 소식을 듣고 제천 의병 중군장이였던 안승우의 본 가인 지평군 양동면(현 양평군 양동면) 안기영(安基榮)의 집으로 찾아가 여러 날을 유숙하면서 의병을 일으킬 것을 숙의하고 창의하였다. 이 때에 선생은 이강년(李康季) 의병진의 종사로 참여하였고, 포군 모집에 전념하 여 6명의 포군을 모집하여 의병장의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선생은 이강년 · 안성해(전기 제천 의병진의 우군장)와 함께 포수병 6명 을 데리고 1907년 4월 (음)부터 원주 · 횡성 등지로 떠나 탄환과 무기를 구하려고 전전하였고, 영춘 봉소동에 이르렀을 때 순검 조준원이 데리고 온 일본군에 의하여 불시에 습격을 당하였다. 그리고 횡성 · 제천 · 영춘 · 청풍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부상자를 치료하였다. 1907년 7월(음) 고종황제의 양위소식과 함께 고종황제가 선전관 이강년 에게 도제찰사를 제수하는 비밀칙서를 판서 심상훈으로부터 받은 이강년 은 의기 충천하여 모든 의병들을 제천으로 집결하게 하고 창의대장이 되 어 의병진을 재편성(중기 제천의병) 하고 토벌에 나설 때 선생은 종사관 의 임무를 맡아 의병진의 군무를 총괄하며 포수병의 초모활동 및 군수품 조달에 전력하며 이강년을 보좌하였다. 운강 이강년(李康季)의 의진은 풍기,문경,단양,영월,연풍,죽렴 · 순흥 등 충북 일대와 강원,경북일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1908년 1월에는 가평(행랑촌), 4월에는 양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6월 4일(음) 운강 이강년이 청풍 전투에서 수천 명의 일본군사 로부터 공격을 받아 선봉장 하한서 등 7명이 전사하고 남은 의병들도 쓰 러지며, 운강 이강년도 무릎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암송 의병진이 와해 될 때까지 선생은 함께 종군하였다. 한편 장임록에 보면 운강 이강년의 의병진에는 전기 제천 의병진에서 활동하였던 이정규 · 원 도상 · 김운선 · 주현삼 · 윤기영 · 맹철호 등의 인물 들도 보이므로, 제천 의병진들의 의병들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보이며 각 지역에서 전투한 것으로 예상된다. 또 1907년 7월 25일(음) 원주에서 창의한 이인영 (1806-1909)과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허위 · 이강년 · 민긍호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연합 120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