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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혁을 만나 그들의 거사계획을 말하여 찬성을 얻고 여물리(餘꺼里) 다리 밑에서 자신이 사 가지고 옹 흰 천에 김종학으로 하여금 <조선독립기 >라 고 쓴 깃발 3개를 만들게 하였다. 장터에 이르러 선생은 150여명의 군중 을 동원하여 그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었다. 동년 6월 21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 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 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了) 신태진(111 泰珍)이 있디 , @ 參考 文鳳 : 獨iLi펴퍼!J史(國家報폈IJ1월) 第2卷 182-183úii 獨iLi펀퍼!J,*,-資料~(國家랙폈D )3원) 第54펴 492-493며1 獨교有功者功폈J錄(國家報勳j따) 第2싫 483며1 22) 안 기 영 (安 基 榮) (1884 - 192이 자(字) : 처 인(處人) 호(號) : 우하(X夏) 안기영(安基榮) 선생은 본은 순흥(順興)으로 문성공 안유(安給)의 후예 이다. 선생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제천(提) 11 ) 의병진 봉기에 선도적 역 할을 하였다. 선생은 항일운동을 한 안종응(安種應) [자(字) : 여성(呂聲) . 호(號) : 퇴 앙(退央)J의 손자이며 의암(殺魔) 유인석(柳職錫) 선생을 의병대장으로 추 천한 의병진의 중군장인 하사(下沙) 안승우(安承禹)의 아들로 태어나 대 대로 선비의 학풍과 충의대의에 투철한 조부와 부친의 영향을 받고 자랐 다. 12세 때인 1896년 4월 13일(음) 부친이 제천 의병진의 중군장으로 제천 전투에서 독전하다 순국 전사하신 장면을 목격한 후 35세 사망 시까지 구국의 일념으로 항일운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처1 결되고 친일 역당들의 만행에 분노한 군중들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