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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건설, 의협투쟁으로서의 총독처단 계획 과 친일부호 처단 등으로 추진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군자금 모금활동 을 하는 한편, 장두환(張斗煥) . 김경태(金淑泰) . 임봉주(林鳳센) 등이 1918년 1월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道高面長) 박용하(朴容夏)를 처단할 때 자신의 집을 논의장소로 제공하며 거사를 도왔다. 그러던 중 1918년 1월경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선생은 일 경에 피체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후일의 재기를 위하여 일경의 잔인한 고문에도 조직의 전모를 밝히지 않았으며 출감 후에도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1933년 별세 하니 향년 60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성원경(成파慶)이 있다. @ 參考文않k : 및IJ決文0919. 9. 26 월城覆審法院) 高환警察흥동史 181때 獨'"il:평훤j史資料集(國l家報勳處) 第11輯 673-714i폐 獨立迎動史(國家報勳處) 76300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7권 479ïKi 20) 송 복 덕 (宋 福 德) (189l. 10. 20 ~ 1965. 3. 10) 송복덕(宋福德) 선생의 본관은 여산이고 아버지 원일과 어머니 이씨의 장자로 평북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17세가 되는 1907년에 의주 주내면의 성심재에서 한학 및 선학 을 공부하다가, 1919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왜경의 지명수배를 받고 깐주로 망명하여 안동에서 안병찬(꽃秉瓚)이 이끄는 청년단에 가입 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봄 비밀리에 고향에 잠입하여 국내의 정보활동과 동지망명의 안 내를 도와주다가 1935년 거점을 중국으로 옮겨 지하공작을 하였다. 1941년 초 중국군 제9전구 지역에서 조선의용대(펙陣義勇隊) 제3지대에 소속되어 지방 각지의 유격대와 연락하여 일군 후방 교란에 주력하다가 116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