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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헤치고 걸었으며 신발이 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손발이 얼어 걸음을 재촉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1919년 3월 17일을 거사 일로 잡고 송화군 봉래면 수교리 장터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일 수 있는 장날을 이용하여 일제 히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추진하였다. 드디어 약속한 거사 일이 되자 박주양 선생은 수교리 장터에 모인 군중 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목청이 터져라 소리 높여 외치며 선도하였다. 힘이 솟아난 시위군중들은 일본 헌병분견소 앞을 지나면서 더욱 기세를 높여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경들이 무차별 총격을 하면서 시위를 저지하며 검거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군중들은 하는 수 없이 산발 적으로 흩어지고 선생도 피신하고 있다가 1920년 3월 일경에 의하여 만세 운동의 주모자로 피체되었다. 포악한 일경들은 비인간적인 위협과 고문으로 사건 내용을 취조하는 과 정에서 “누가 시켜서 했느냐” 고 다그쳐 물었고 이때 선생은 “닭이 울라 고 해서 우느냐? 때가 되니까 우는 것 아니겠느냐?" 라고 항변하였다고 한다. 같은 해 5월 18일 해주지방법원 송화지청에서 소위 제령 제 7호 위반으 로 징역 1년을 언도 받았으나 일본 천황 득남 기념일이라 하여 감형되어 6개월의 욱고를 치르게 되었다. 출감 후에는 요시찰 인물로 주목받아 사사건건 괴롭힘과 감시를 당하였 다. 내 나라에서도 마음 펴고 살 수 없는 통분을 누를 수 없어서, 1939년 정든 고향을 등지고 노모 만삭이 된 아내와 줄줄이 어린 자식을 이끌고 일경의 감시가 적은 낯설고 물 설은 만주의 오지인 통화성 유화현 산골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다시 1년 후에 한민족만 20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신흥툰(심양 에서 백여리 떨어진 조선인만 2백여호가 모여사는 마을)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은 그곳에서 교회를 신축하고 장로 일을 하 면서 민족의 단합심을 키우고 망향의 서러움을 달래기 위한 민족사랑 운 동에 앞장섰다. 또한 순수 조선족 학교인 신흥툰 소학교를 설립하는데 일 조를 하면서 2세 교육에도 헌신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으며, 1948년 중국 천진(天律)을 거쳐 인천(仁川)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11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