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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參考 文敵 . 判決文0919. 10. 18 大邱覆審法院) 判決文0919. 11. 15 高等法院) 身分l帳指救照쉽回報書 3. U펀퍼!J팝錄(李龍洛) 652面 쏠山 · 慶南 3.1運파j맞(3 . 1同志쉽, 1979. 9. 1이 426 .. 427面 獨立週파j史(國家報勳處) 第3卷 293 . 294面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11卷 123面 18) 박 주 양(朴 朱 陽) (1898. 11. 12 - 1998 .8. 5) 박주양(朴朱陽) 선생은 황해도(黃海道) 송화군 (松示那) 연방면(連훨따j) 마산리(馬山里)에서 박 제택(朴濟澤)과 윤신봉(尹信鳳) 사이에서 2남 3 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께서는 일찍이 기독교에 입문하여 교회의 일을 하였기 때문에 선생도 7세 때부터 송화(松未) 신화교회에 다니면서 서구 개화사상 의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다. 일제치하에서도 교회에 다니면서 청년회 회장 일을 맡는 등 열심히 일 을 하였고 목사들의 설교와 안창호 선생의 대중연설을 통해서 시국에 대 한 불만과 나라 없는 서러움을 뼈아프게 느끼곤 하였다. 선생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교회 청년들과 모여서 일제에 눌려 사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 하곤 하였다 그러던 중 3월1일 파고다 공원에서부터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전국 방 방곡곡으로 메아리치며 이곳에도 힘차게 밀려왔다. 그리하여 선생은 장연 읍에 사는 서재필의 동생 등 교회 청년들과 여러 차례 모임을 갖고 장날 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에서 등사기로 비밀리에 선언서와 태극기를 밤새도록 제 작하여 이것을 가슴에 품고 만세운동에 참가할 사람을 찾아다니며 한 사 람 두 사람 힘을 합쳐 나갔다. 선생께서 때로는 송화에서 재령까지 100여 리 길을 일경의 눈을 피해서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를 무릅쓰고 논과 밭 Ill.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