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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고 하여 일제가 또 축하행렬을 벌이자 선생은 이에 격분하여 산 위에 서 바위를 굴려 축하행렬을 방해하고 만주로 도피하다가 일본헌병에 체포 되어 구류처분을 당하였다. 1916년 만주로 망명하여 명동중학교(明폈中學校)에서 학생들에게 민족 사상을 배양하고 민족계몽운동에 헌신하다가 귀국하였다. 선생은 1919년 3 .1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3월초 강원도 통 천지역에도 독립선언서가 서울로부터 입수되어 박성준(朴成俊) 선생과 최 상린(崔함職) . 김 두만(金斗浦) . 안흥식 (安興植) . 우낙영 (禹洛榮) 등과 함 께 간성군(꾸城那)(현재 고성군) 신북면(新北패) 사무소에서 면의 등사기 를 이용하여 독립선언서 90여매를 인쇄하는 등 임남면(돼南벼) 장전리(흩 剛낼) 일대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세울 때 선생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3월 31일에는 태극기 250여개를 만들었고 4월 l일에는 장전리 기독교인의 집을 찾아다니며 다음날 있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 유하였다. 선생은 4월 2일 기독교인 20여명이 모이자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부 하고 앞장서서 동리 다리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선도하다가 출동한 일 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년형을 언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출감 후에 협성청년회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을 계속하다가 일본 오오사까(大版)로 가서 1923년 관서조선인호조회 를 조직하여 교포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쓰루바시(碼橋)경찰서를 방화하려다 미수법으로 체포되어 구류를 당하였으며, 일본인 부호 하세가와(長삼川)를 협박하여 독립자금을 강탈하려한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3개월간의 예심 끝에 형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일제가 선생에 대해서 오오사까(大版) 추방령이 내려 교오또(京都)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1925년 교오또(京都) 조선노동동맹 상무에 선임되어 교포의 권 익을 위하여 활약하였으며 동년 도오꼬 본부의 재일조선노동총동맹 상무 에 선임되었다. 또 선생은 1926년 친일 단체인 상애회(相쫓會) 회원 50여명과 일본경찰 이 공모하여 노총본부를 내습하였을 때 유혈투쟁으로 완강히 항거하였다. 선생은 1927년 흑우회에 가담하여 박열(朴烈) 동지와 항일반공투쟁에도 계속하여 활동하였다. 110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