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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3월 경남 도평의원 김기정(金벌正)이 도평의회 회의석상에서 조 선인 교육의 불필요 및 조선어의 통역철폐를 주장하는 매국적 행동을 자 행하자 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김기정(金供正) 징토시민대회(徵討市 民大會)를 열었다. 정토대회에서는 김기정의 부일(附日) 행위에 대하여 강 력 규탄하고 공동절교를 선언하며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시킬 것을 결의 하였다. 선생은 동 대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통영 시민들에게 결의 사항을 인쇄하여 배포하고, 김기정에게는 동년 4월 27일까지 일체의 공직 에서 사퇴할 것을 촉구하였으나, 김기정의 고소로 인하여 동년 5월 9일 선생은 일경에 피체(被速)되었다. 선생은 유치장 안에서도 단식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하였으며, 선생 등의 구금에 분격 한 황덕 윤(黃德、允) . 황봉석 (黃奉石) . 이 태 원(李泰源) 등 25명 의 인사들은 동년 5월 10일 모임을 갖고 이들을 위한 금전모집, 변호사 선임, 석방운동을 위한 시민대회 개최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의해 이와 같은 계획이 무산되자 동년 5월 13일 황덕윤 · 황봉석 등은 다시 선 생을 비롯한 구금인사들의 석방과 동포들의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 5백여 매를 인쇄하여 시내 각처에 배포하였다. 이에 고무된 수천명의 군중들이 김기정의 집을 습격하여 투석과 곤봉으로 건물을 파괴하는 한편 통영경찰 서로 몰려가서 구금인사들의 면회와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으며, 이 일로 인하여 황덕윤 등 17명이 일경에 피체되었다. 선생은 1928년 5월 l 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명예훼손 및 출판법 위 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형을 언도 받고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3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 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손(孫) 박정치(朴正治) , 손부(子歸) 양숙자 (梁淑子), 증손(曾孫) 현 일 이 있다. @ 參考文敵 , 判決文092l. 2. 29 꿇山地方法院 統營支廳) 判決文092l. 4. 25 大邱覆審法院) 判決文0928. 5. 1 大邱覆審法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짧 73 . 74 . 820 . 821 面 東亞 日 報0927. 4. 1, 4. 8) 獨立有功者功勳錄(國家報勳處) 第7卷 440i효i 108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