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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전국 각지에 선간회 지회가 설립되기 시작하여 1929년에는 138개 지회가 설립되고 회원수가 37,309명에 이르렀다. 선간회는 각 지방에 저명 한 항일 지사들이 많이 참가하여 배일적(排日的)이었고 궁극적인 목적은 조국 독립에 있었다 1930년 만주의 청산리 싸움에서 패전한 일본은 그 보복으로 만보산 사건 을 일으켜 일제의 군경이 우리 동포를 수만 명이나 학살하니 안재홍을 위 원장으로 한 재만동포 옹호동맹을 조직하고 박동완 선생은 재무위원장을 맡아 현지에 파견되어 사건현장을 조사하고 동포틀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 선생은 3. 1운동 이후 한복만을 입으면서 조선이 독립하기까지는 바지대 님을 매지 않았으며, 정확한 시각은 일본의 시간이기 때문에 그들의 시간에 맞추어 살지 않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시계를 항상 30분씩 늦추어 놓았다. 1933년 하와이로 망명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근무하는 한편, 1934년에는 <한인 기독신보>를 창간, 그 편집을 맡으면서 국내의 흥업구락부와 비밀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선생은 교회, 언론, 민족운동의 바쁜 세월을 보내던 중 1941년 초 불의 의 병을 얻어 그해 2월 23일 이국 땅에서 별세하였다 박동완 선생은 언론인으로서, 또 목회자로서 사회에 봉사하였으며 일생 을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선한 민족운동가이며 한국청사에 영원히 빛날 우 리 민족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 였다. 부천에 거주하는 유족으로는 자부(子鋼) 이금복(異鎬福) , 손(孫) 박재진 (朴在鎭) . 박재상, 손부(孫歸) 성영숙(成줬-淑) , 증손(曾孫) 박혜원(朴慧遠) 이 있다 @ 參考文뚫k : 獨立運굶J;史(國家報勳處) 第2卷 70~71 . 76~77떼 aa3立i뿔動史(國家報勳處) 第7청 643~645面 獨立運폐j史(國家報勳處) 第8卷 566 ~ 567 . 590떼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10卷 752~754따1 獨立運動史資料集(慶l家報勳處) 第5卷 12~ 15 . 28~29 . 38~51 面 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第14卷 292~293面 106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