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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부에 연행되었다 이때 이들이 연행되는 행렬은 당시 2만여 군중들에 휩쓸려 하오 5시 반경에야 도착하였다고 한다. 만세 그 일로 선생은 1920년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시위 위반 출옥한 후에 선생은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위원장을 맡아 일했 으며 신간회 간사를 역임하였다. 신간회(新幹會)는 3. 1운동이 일어난 이 후 우리 국민은 민족 해방에 대한 열망이 고조되고 이에 따른 일제의 탄 압이 가일층 강화되는 반면 전 민족적인 총 역량을 집결할 필요에 의하여 출범하게 되었다. 일제 탄압에 의한 투쟁 조건이 불리한 환경 속에서 우 리나라의 각 사회 단체와 민족주의 단체가 총망라되어 결성된 것이 신간 회였다 1927년 1월 9일 신간회 발기인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강령을 발표했다. 1.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2. 우리 는 단결을 공고히 함. 3.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발기인 34명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김명동(金明東) 김준연(金俊淵) 김탁(金鐘) 권동진(權東鎭) 정재룡(鄭在龍) 이갑성(李甲成) 이승훈(李昇薰) 정태석(鄭泰奭) 이승복(李昇題) 이정(李痛) 문일평(文}平) 박동완(朴東完) 이관용(李灌鎔) 백관수(白寬洙) 신석우(申錫雨) 신채호(由갖浩) 안재홍(安在鴻) 장길상(張吉相) 장지 영 (張志映) 조만식 (曺硬植) 최 희 익 (崔喜益) 최 원순(崔元淳) 유억겸(兪憶暴) 박내홍(朴來弘) 한기악(韓基폼) 한용운(韓龍雲) 이 상재 (李商在) 한위 건(韓偉鍵) 홍명 희 (않命熹) 홍성 희 (洪性熹) 이정섭(李品燮) 이종린(李鐘職) 이순닥(李順繹) 이종목(李種種)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창립 총회가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출석 회원 200여명과 많은 방청객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고 이날 회장에는 이상재, 부회장에 홍명희(사임 후에 권동진)가 선임되었으며 간사 35명을 선정하였다. 여기에서 박동완 선생은 간사로 선임되어 간사회의에서 재무 부의 책임을 맡았다. II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