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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兩) 교단이 뭉쳐서 거국적으로 일으킬 것에 합의를 보았다. 그리고 2월 22일에는 기독교의 박희도(朴照道)를 통해서 시내 학생 대표들과 협의하 여 학생들도 만세 운동에 합류할 것을 결정하였다. 2월 24일 천도교 대표 최린과 기독교 대표 함태영(成台永)이 각각 양파 (兩派)를 대표하여 실무를 맡아서 독립선언서 문건의 작성, 인쇄, 민중동 원, 일본, 미국, 파리강화회의 등에 보낼 문건의 전달 등을 분담키로 하였 다. 그리고 2월 25일에는 최린 함태영 회담에서 거사일을 고종 황제 인산 (因山)의 전전일인 3월 1일로 하고 장소는 파고다 공원으로 결정하였다. 민족대표로는 천도교에서 2월 25. 26일 양일에 걸쳐 비밀리에 모여 중 앙의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전명덕·양한묵·이종일·이종훈· 홍병기 · 김완규, 그리고 이때 이미 상경중이던 평양의 임예환 · 나인협 · 용강의 · 홍기조 · 중화의 나용환 · 임실의 · 박승준 총 15명을 민족대표로 선정하였다. 기독교에서는 2월 26. 27 일에 걸쳐 비밀 회합을 거듭한 결과 16명을 선 정하였는데 감리교에서는 기독신보사에 있던 박동완, 평양의 신홍식, 서울 의 박희도 · 이필주 · 신석구 · 오화영 · 김창준, 원산의 정춘수, 해주의 최성 모였으며 장로교에서는 정주의 이승훈 · 김병조 · 이명룡, 평양의 길선주, 선천의 양전백, 의주의 유여대, 서울의 이갑성 등이 선정되었다. 이밖에도 불교에서는 최인과 자주 접촉하던 서울의 한용운과 그가 추천 한 해인사의 백용성 2명이 불교 대표로 선정되어 모두 33인이 선정되었다. 동년 2월 27일에 이인환,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오하영, 최성모, 김창 준, 신석구 등과 함께 정동교회 내에 있는 이필주 집에 모여 천도교 측에 서 작성한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하였다. 이튿날인 28일 밤에는 재동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 협 의를 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이 전개되는 날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 는 태화관에 손병희 등 33인이 참석하여 독립선언에 따른 간단한 식순이 진행되고 독립만세 삼창이 끝난 뒤 민족 대표들은 축배를 드는 한편 조선 총독부에 대하여 ‘잡아갈 테면 잡아가라’ 하는 태도로 지금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있다는 뜻을 통고하였다. 이에 따라 즉각 출동한 일본 헌병 , 경 찰은 민족대표들을 체포하고 자동차로 서울 왜성대(1"委城쫓) 소재 경무총 104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