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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몸소 천자포(千字패)를 휴대하고 대원들을 지휘하여 광주(光州) . 담양 (澤陽) . 순창(淳昌) 등지에서 계속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의병장 성재 기상연(奇參術)이 광주에서 순국하자 선생은 격문을 돌리고 김공삼(金公 三)과 함께 흩어진 군사를 수합하여 본진(本陣)을 세우고 스스로 포사장 (댐射將)이 되고, 김공삼은 선봉장, 김일문(金一文)을 포장(패將)으로 임명 하고 의진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성재의 의진은 주요 의장들에 의하여 나뉘어 지휘되었기 때문에 의진의 의기가 다소 감소된 듯 하였다 이에 선생은 김공삼과 의논하여 여러 진을 합하여 강대한 세력을 구성할 계획을 세웠다. 제일 먼저 김영 업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합진하기를 청하였다. 이들은 광주를 습격하여 성재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중, 김영업이 유종여 등에게 피살되었다. 선생은 군사를 거느리고 손룡산(앓福ILI)으로 들어가 하수인 2인을 잡아 서 죽일 수 있었으나 유종여는 놓쳐 버렸다. 군사를 이끌고 다시 장성으 로 돌아와 교련하면서 그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동안 성재 의진에서 함께 활약하던 김준(金準) 등이 광주 어등산에서 순국하는 등 점차 형세가 어려워졌다. 1909년에는 선생의 의진의 규모는 다소 확대된 듯 하였으니, 1909년 2 월에 부하 박이일 (;tl、爾日)이 체포된 후 공술(따述)한 바에 의하면 “부하는 110명이고 선봉장 이도운(李道굽) . 중군장 손도연(孫造演) . 도십장(都 「 將) 구연역(具連譯)과 좌우의장 및 참모를 거느렸다" 무기는 총 139정, 칼 24본 등으로 의진 중에서 비교적 무력이 강력한 편에 속하였다. 1909년에는 상당수의 의진이 해체되었으므로 선생의 의진은 형세가 외 로웠기 때문에 전해산(全海山) 의진과 밀착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남포(藍浦) . 부안(款安) 등 해안에 의지하여 활약하였다. 선생은 동년 4월 20일에 부하 100여명을 거느리고 부안 상서면(上西面) 에서 일본 기병대와 접전하였으며, 점점 적의 포위망이 좁혀져 의병활동 을 전개하기 힘들어지자 의진을 해산(í1셉~)하고 가협(JJ미l짜) 산중으로 거 처를 옮겼다 선생은 자신의 은신처마저 적에게 노출되어 적의 포교(補校) 가 이르자 크게 소리 치기를 “내가 여기 있으니 마음대로 잡아가라” 하였 다. 이에 잡히자 안색을 변치 않고 꾸짖는 말이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 니 저들도 선생을 의롭게 여겼다. llI. 광복후 부천거주 독립운동가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