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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자네는 한미한 집안이라 나라의 은혜를 받지 않았는데 어찌 그렇게까 지 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선생은 답하기를 “우리가 폼에 옷을 입고 곡 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어느 것인들 나라의 은혜 아님이 없거든, 하물 며 5백년에 대대로 본국 신민( I료民)이 되었다가 국사가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모르는 체한다면 천리(天理)와 인륜(人倫)이 어디 있는가" 하였다. 을사조약(ζE條約)이 늑결(웹j結)되고 성재(省爾) 기삼연(奇參仍)이 의 병을 일으키자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 하고 동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 하였다. 당시 모양현(후陽쁨)의 무기고에 좋은 포u패)가 많이 저장되어 있다는 정보를 안 선생은 비밀히 성재(省짧)에게 말하기를 “우리 현이 비록 작으 나 성곽이 견고하고 무기가 정예하니 이것을 차지하면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성재(省、짧)는 본시부터 선생의 의기(義氣)를 들었으므로 출병하여 문수 사(文珠츄)에 주둔하고 있던 의진을 이끌고 모양현을 내습하였다. 선생은 현내(縣內)의 동지들과 내응하여 창고의 무기를 모두 꺼내어 일군과의 접 전에서 왜적 수명을 살상하였으나 의진의 희생도 34명이나 되었다. 이 때 훈련되지 않은 많은 의병들이 무기룰‘ 버리고 도망하였으나, 선생은 그 뒤 를 따라 무기를 거두어 감추었다가 군사가 모이는 날에 비밀히 기별하여 운반해 가게 하였다. 당시 선생은 성재(省鷹) 의진에서 김익중(金寶中) . 서석구(徐錫球) . 전 수용(全量庸) . 김치곤(金致坤) . 박영건(朴永健) . 정원숙(鄭元淑) . 성철수( 成喆修) 등과 더불어 종사(從事)로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통령(統領)에 김 용구(金容球) . 참모에 김엽중(金摩中) . 김수봉(金樹鳳) . 선봉에 김준(金 準)이 임명되었다. 이와 같이 의진을 편성한 후 성재(省爾)는 격문을 사방 에 돌려 대중의 협력을 촉구하고 적에게 부역하는 자는 처단하고 그 재산 을 볼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성재 의진은 무장(끊長) . 법성포(法및浦) . 고창(高做) . 장성(長城) 등지 에서 위명(威名)을 떨쳤으며, 선생은 이들과 함께 전남 각지에서 일군과 교전하여 많은 성과를 올렸다. 선생은 1907년 9월 영광(靈光)에서 포사대장(패射隊長)으로 활약하였으 100 부천독립운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