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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惡)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 우리는 흔히들 선악이 명료하게 구별되는 가치라 여깁니다. 따라서 특별히 악한 사람이 아니라면, 강압이나 폭력에 의해 억지로 강요당 하지 않는 이상은 극악무도한 행위에 가담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 게 됩니다. 더군다나 윤리와 도덕에 입각한 분별의식을 갖추었다 생 각되는 우리 자신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히 악을 거부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 할까요? 처음부터 악한 사람들만이 악을 행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은 언제까지고 악과 무관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과 연 타당한 걸까요?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들을 던집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정권 당 시 유대인 운송의 책임자였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정리한, 그리고 그 위에 선악에 대한 본인의 통찰력을 담은 글입니다. 언론사의 의뢰를 받아 쓴 르포 형식의 글이기 때문에 다소 건조한 느낌을 주는 문장의 연속으로 쓰인 글 입니다. 나치 전범하면 인 간의 탈을 쓴 악마 내지는 미치광이 정도로 여기기 일쑤였던, 그래서 나치가 저지른 온갖 만행을 그저 비정상적인 인간들이 저지른 예외적 인 비행으로 받아들이던 당시의 사고관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던 진 메시지는 매우 문제적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말하고 자 했던 바, 그것은 유대인 학살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운영에 공헌한 아이히만이 사실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우리와 별 다를 바 없는 평범하 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아이히만은 같은 사 회 내 여느 사람들과 딱히 다를 바 없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던, 정신적 으로 어떤 이상을 보이지도 않았던 일반적인 공무원, 한 가정의 가장으 로서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치의 전체주의에 매 몰되어, 온갖 개념어, 이를테면 직무라든지 과업이라는 용어 등으로 뒤 덮인 자기 업무의 본질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평범한 성격임에도 불 구하고 수백만 유대인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기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것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이라고 한나 아렌트는 말합니다. 이른바, 악 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는 것이죠. 1960년대, 나치의 광기를 반성하는 가운데 나치를 그저 단순히 절대악 으로만 정의하고 넘어가려는 경향이 있던 서구인들 사이에서 아렌트 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막대한 반발을 낳습니다. 심지어, 아렌트 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측에서는 아렌트가 나치 전 범을 옹호하려 했다는 이유로 맹렬하게 비난, 나중에는 아예 이스라엘 입국 자체를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그렇지만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인간이 어떻게 악을 행하게 되는가?'라는, 수 천 년 넘게 이어진 윤리학의 근본 물음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처 럼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선악이, 이제는 개인의 선택 차원에 국한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된 덕분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평범한 사람’인 아이히만이 저지른 막대한 살상이 소 름끼치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를 스스로 악이라 여기지 않는(혹은, 여기지 못하는) 아이히만에 대해서는 말로 제대로 표현하기 힘든 공포 마저 느꼈습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제2, 제3의 아이히만이 되지 않 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 누구도 자신할 수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 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마지막장을 조용히 덮었습니다. AF 글 상병 주은수 (제10전투비행단) 한나 아렌트 지음 도서출판 한길사 펴냄 OPINION 책 읽는 공군 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