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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강의, 더 이상한 과제 작전사령부 근무지원단 일병 김종빈 51 집 앞 골목을 지나며 제18전투비행단 병장 김석영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펜 내려놓으시고 나가주시면 됩니다.” 작년 6월 말 즈음, 나는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쳤다. 여전히 적응은 안 됐지만 어쨌든 대학교는 시험이 끝나면 다음 학기가 개강할 때까지는 종강인 상태다. 종강 후 약 120일 지났을 무렵, 나는 109번 보라매가 되었다. 세상만사 쓸 데 없는 것들은 하나 없다고, 저기 흉하게 튀어나온 돌부리도 의미가 있다고 어른들은 그렇게 멋진 말을 하셨다. 작년 6월 그 때의 종강은 곱씹어보면 개강이었다. 조금 이상했지만 분명히 그건 개강이었다. 사회에서 흔히들 말하는 ‘놀 때’가 끝났기에, 나는 그 ‘끝난’ 뒤를 알기 위한 긴 강의들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그곳에는 교수도, 조교도, 그 흔한 300원짜리 볼펜도 없었지만 이상하게 어디선가 강의들이 끊이지도 않고 내 내면에 나타났다. 그 강의 제목들은 ‘나의 뒷모습 돌아보기’, ‘인간관계 반성’ 같은 이상한 것들이었다. 그 중 가장 어려운 강의는 ‘나의 미래 설계’라는 과목이었는데, 이 괴상한 강의는 내 자리에 앉았다 하면 책상 위에 빈 백지가 놓여있는 것이었다. 그 백지는 아무것도 없이 나를 거대하게 짓누르는 힘이 있었다. 나는 그 힘에 압도되어 어떤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도망쳐 나왔다. 그리고 또 그 수업에 들어가면 항상 그 장면만 반복되는 것이다. 아무리 도망쳐도 내 자리에 놓여있는 그 거대한 백지. 공군 입대 후 ‘군대 생활’이라는 수업을 아직 절반조차 이수하지 못했지만 이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그 어려웠던 ‘나의 미래 설계’ 시험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확실하게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언젠가 ‘군대 생활’의 종강이 오는 날, 그 날이 왔을 때 내가 그 백지에 얼마나 훌륭한 답안을 적고 나올지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 백지 맨 윗줄에 제목이라도 꾹꾹 눌러쓸 수 있는 내가 됐다면, 그 자신감으로 언젠가 A+까지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2013년 6월. 유난히도 더웠던 그 해 여름, 나는 군 입대 전 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마쳤다. 종강은 무더위에 쌩쌩하게 틀어 놓은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과 함께 나의 몸과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시험에서 제출하고 나온 백지에 가까운 답지 때문은 분명히 아니었다. 종강을 하고 방학을 맞은 다른 이들과 달리 군 입대 한 달 전이라는 상황에 놓인 내 머릿속은 어떤 형체 없는 두려움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2년간 가족, 친지와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TV나 인터넷 같은 매체에서 접해온 무자비한 군대 병영문화에 대한 막연한 공포까지. 이런 마음 상태로 도저히 종강 파티 따위는 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마음만 더 심란해 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집으로 돌아와 불안하고 절망적인 상상이나 하는 것이 제 사명인양 침대에 누워 꿈틀 거렸 다. 그렇게 집돌이가 되어 3주를 우울증 환자처럼 보내고 나니 어머니가 집안에만 박혀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혹은 한심해보였는지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며 문밖으로 떠밀었다. 아무 계획 없이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나선 집 바깥 풍경은 조금 색달랐다. 15년 동안 살아온 집 앞 골목을 지나 동네슈퍼, 자주 가는 PC방, 세탁소, 책방, 편의점, 호프, 분식집. 수없이 봐왔던 어느 것 하나 감회가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무 버스나 잡아서 탑승했다. 다니던 고등학교가 보였다. 버스에서 내려 학교 운동장을 돌아보았다. 문득 밀려오는 과거의 향수에 기억을 되돌려본다. 홀로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로 진학해 중학교 친구들과 헤어졌던 기억부터, 새로운 친구들에 대한 기억, 정신없었 던 고3 수험생 시절 기억. 그 기억은 이제 추억이 되었고, 추억은 가끔 나를 이렇게 물렁한 사람으로 만들어주곤 한다. 돌이켜보니 입대직전, 그때만큼 내 인생을 진지하게 회고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어느덧 나도 전역을 두 달 정도 앞둔 말년병장이 되었다. 입대 전 1주, 인생을 되돌아본 그 때 그 기억조차도 시간이 지나니 추억이 되었다. 그야말로 참 많이 들었던 그 말,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 한 마디가 참 많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아마 지금 집 앞 골목을 둘러보고 모교에 들러도 그때와 같은 감흥은 없을 것이다.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던 입대 전 내 모습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내 삶에서 가장 힘이 필요한 순간마다 꺼내 볼 것 같은 추억이 됐다. 그럴 리 없지만 만약 내 입대직전 과거와 조우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 또한 무사히 잘 지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