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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자리에 국제연합 한국통일위원단을 대표하여 몇 마디 축하의 말씀을 드리게 된 것을…귀 공군의 비행시위를 보 고 특히 기뻤고…한국항공력 이 단시간 내에 이룬 거대한 발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공군참모총장 김정렬 소장의 널리 알려진 기술과 정력에 비추어 볼 때는 그렇게 놀랄 만한 사 실은 아닌 것입니다. 또…최용덕 장군과 그의 유능한 지도에 이렇게도 탁월한 항공대원을 조련한 항공사관학교를 찬양 하는 바입니다. 아름다운 대한 민국의 공중에서 살고 또는 싸우는 장병들의 용감성과 애국심을 다시 한 번 찬양하는 바이며 그들은 침략자를 격퇴하고 그들 조상의 생활방식을 유지 하기 위하여 공동노력과 더불어 세계 각국 항공 동지들과 같이 싸우는 것입니다.…” - 공군 제4주년 기념식에 제하여, 출처 : 코메트 통권 제1호(1952년 11월) 그간 국제무대에서 약소국가와 민족으로 치부되어왔고, 분단과 전쟁의 비극마저 겪은 처지였다. 그런데 이 연설문을 보면, 공군의 급속한 발전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력과 저력의 단면을 외국인들 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공군이 발전하고 유엔공군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조종사 들의 희생도 당연히 늘어나게 되었다. 강릉전진기지는 이 기간 공군의 실질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전투비행부대였다. 전쟁을 수행하던 이 기지의 풍경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 ÿ활주로 여기저기엔 하루의 고달픈 피로를 쉬려는 듯이 믿음직한 전투기지가 서산에 지는 석양빛을 은익에 곡선을 그리며ÿ청량한 동해바람은 5장6부에 묻은 도회의 塵垢(진구)를 깨끗이 씻어주는 듯이 상쾌한 기분은 여로를 잊게 한다.ÿ한쪽에 조종복에 홍색 마후라도 말숙하게 차린 조종사들이 즐거히 환담하고 있다ÿ이들이 매일같이 북한 깊이 출격하여 공산괴뢰군의 혼담을 서늘케 하는 용사라 하기에는 의심할 정도로 침착태연하며 온순하다.ÿ적의 대공 포화에 불행히도 炎上(염상)하는 기체를 가지고 友軍(우군)진으로 오던 중 기지 근처에 불시착하여 구사일생을 얻은, 그러나 전신에 화상을 입은 이재국(李載國) 중위가 들것에 놓여 무대 전면으로 향해 오는 것을 보았다. 부대장을 위시하여 전우들이 다정한 낯으로 그를 위로한다. ÿ이 중위가 나를 보더니 반겨 웃으며 가벼히 손을 흔든다. 나는 반가히 그의 앞으로 갔지만 할 말이 없다. 다만 그의 화상 입은 손을 힘껏 쥐어 주었을 뿐ÿ맬로디이는 ‘젊은 날의 꿈’을 가벼히 그리고 甘味(감미)하게 젊은 용사의 가슴을 위무하고 있다.” 이 글은 1953년 4월 26일 제10전투비행단이 있는 강릉기지를 방문한 김준(金俊) 중위가 당시 기지에 있었던 장병위로회를 목격하며 쓴 ‘일선과 휴우매니티-전투기지의 하루(코메트 제5호/1953년)’의 글 일부이다. 이 글에 나오는 ‘젊은 날의 꿈’이라는 멜로디는 1938년 송달협과 장세정 가수가 발표한 가요다. 이 노래를 공군 장병들이 즐겨 불렀던 듯하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삶을 지속시켜야 할, 그리고 살아가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우주적 질문에서부터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 세대가 이루지 못한 과제를 당 세대가 해결해야 하는 공동체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직면한다. 60여 년 전에 일어난 전쟁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얼마 전 대학 강사로 있는 후배로부터 부탁을 하나 받았다. 소설가 지망생의 문학수업을 무조건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29살의 늦깎이 여대생은, 여러 나라들을 거쳐 사지를 뚫고 한국으로 온 탈북자였다. 이 학생과의 만남 하나하나가 서로 문화충격이었다. 같은 민족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문화충격이라니. 이 학생은 나와 문학공부를 하면서 지금은 밝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전쟁 속에서도, ‘젊은 날의 꿈’을 잃지 않았던 전 세대처럼, 우리들의 운명은 우리들 의 의지와 지혜로써 헤쳐 나가야 한다. 그녀의 손목에 선명하게 남은 칼자국과 되찾은 밝은 미소가 오늘따라 눈에 선하다. 여의도기지에서 이륙한 P-51기들이 적진이 있는 해주를 향해 편대비행하고 있다. (1951년 3월) 1951년 3월 여의도기지. (이강화 장군 소장)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