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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되었고, 설마 하던 전쟁이 일 어 나 고야 말았 다. 믿고 싶지 않았던 북한의 전면 남침 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수백만 명의 인명을 앗아가고 천만 이산가족을 낳고, 전 국토를 폐허로 만들었다. 민족에게 저지른 그 죄과를 어찌 할 건 가? 그 참 상 과 비극은 말로 다 형언하기 힘들다. 당시의 참상을 두 시인의 시로 엿보기로 하자. ‘참호’ 시가 전선의 상황과 정서를 그린 시라면 ‘폐허에서’라는 시는 전쟁의 고통을 겪는 국민들의 상황과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공군은 전투기 한 대도 없이 전쟁을 맞이했지만 손 놓고 있지 않았다. 육군이 후퇴를 거듭하 는 가 운 데 에 서 도 공 군 은 적 의 남침 을 저 지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6월 25일 당일 여 의 도 공 군 기 지 가 적 의 야크기에 공격을 당했지만, 공군은 다음 날, L형 정찰기에 30파운드 폭탄 3발씩을 안고 출 격 하 여 적 의 지 상 군 를 공격했다. 보유하고 있던 274개의 폭탄을 다 쓰자, 정찰기로 적정을 살피는 데 주력했다. 6월 27일부터 이 정찰비행으로 다수의 조종사 와 정비사들이 전사하고 말았다. 미 해·공군의 신속한 대응과 유엔의 결의에 의한 유엔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수 있었다. 낙동강 전선에서도 우리 공군의 정찰기들은 쉼없이 비행하며 지상군에게 정찰 결과들을 제공하였다. 미 공군이 우리 공군에 지원한 P-51기 전투기들과 헤스 대령이 지휘하는 지원부대에 힘입어 전투비행이 가능한 공군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51년 김정렬 초대총장의 결단으로 헤스 대령을 중심으로 한 조종사 훈련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 자체의 훈련 시스템으로 조종사 배출을 하는 장기적 체체를 구축하고 마침내 미 고문단으로부터 우리 공군의 단독작전능력을 인정받아 1951년 9월 강릉 전진기지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 전쟁의 초기 일 년 반 기간, 공군이 유엔공군의 단위군으로서 입지를 세우기까지 공군인들의 노력은 거의 결정적이었다. 그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미 공군의 지속적인 지원도 사실 미약했을 수도 있었다. 1952년 10월 공군 탄생 4주년을 맞은 기념행사에서 유엔한 국위원단(UNCOK) 위원장은 우리 공군 전투기들의 시위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GLOBAL & INSIGHT 공군역사 에세이 글·사진 제공 이윤식(작가) 38 포성 요란히/골짜기를 파고들면/여름 한철에도/선듯한 참호 속에는/익 은 가을 열매보다 더 붉은/정열이 탄다.//적을 에워싸기에/적을 무찌르 기에/새로운 용기를 부어주는/참호 속에는/내 집보다 더 포근한/정이 스 민다.//흘려진 전우의 피가/물들여진 산마루를/다시금 파는 흙내의 참호 속에는/피비린내보다 더 짙은 향수가 어린다. - 참호(윤희열 작), 출처 : 코메트 통권 제5호(공군순보 제24호, 1953년 4월) 하꼬방[板子幕] 유리딱지에 애새끼들/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내려다보던 해빨이 눈부시어 돌아선다./나도 돌아선다.//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춰라.//피 떰이가 소북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체니[少女]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죄 하나도 없다.//나는 술 취한 듯 흥그 러워진다./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 폐허에서(구상 작), 출처 : 코메트 통권 제3호(공군순보 제22호, 1953년 2월) 공 군 역 사 에 세 이 1953년, ‘젊은 날의 꿈’ 그리고 2015년, ‘젊은 날의 꿈’ < 제 2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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