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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IN 이달의 역사 1914년 6월 10일 대조선국민군단 조직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 연무부에서 조직을 확대・개편하여 1914년 6월 하와이 오아후섬에서 박용만의 주도 하에 창설됐다. 당시 미국 정부는 자국 내에서 외국인의 군사 활동을 금지하고 있었으나 목총으로 훈련하는 조건으로 허락을 받았다. 박용만을 단장으로 직제는 미국 군제에 따랐는데 군단사령부 밑에 경리부, 제작소, 병학교, 훈련대, 별동대 등을 두었다. 훗날 최초의 항일 비행사 학교인 윌로우스 비행학교를 세운 노백린 장군이 박용만을 조력했었고 이 국민군단의 별동대 주임이었다. 학도들은 낮에는 생업에 종사했고 저녁에는 미군의 영문교본으로 공부하며 정식 군대와 같은 훈련을 받았다. 창설 당시 103명의 구성원으로 출발했지만 4년 후인 1916년 10월, 311명까지 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미국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승만이 군사활동 보다 외교 노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데다 박용만이 실전에 참가하기 위해 극동지역으로 떠나면서 조직 유지가 어려워져 결국 해체되었다. 1926년 6월 10일 6・10 만세운동 1919년 3・1운동의 소용돌이 속에 해외 각지에서 움텄던 독립운동도 일제의 교묘한 술책과 탄압에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한편, 제위에 오른 뒤 4년 만인 1926년에 서거한 황제 순종에 대한 국민적인 애도 분위기는 국가 잃은 민족의 설움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총계와 학생들 사이에서 순종 인산일(장례식)에 맞춰 독립만세운동과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열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시위운동을 준비하던 지식층은 격문을 수천 매 인쇄해 놓았고 마침내 거사일인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 4천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하였다.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하였다. 군대까지 동원한 일제의 감시망에 저지당하여 규모는 3・1운동 처럼 크지 않았지만, 6・10 만세운동은 침체 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1914 _ 1926 _ 1949 6월의 역사 June 광복 70주년 특별기획 32 1949년 6월 10일 공군사관학교 1기생 입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육상경비국이 육군으로 개편되자 항공사령부도 ‘육군항공사령부’로 개칭되었다. 1949년 1월 14일에 육군항공사관학교가 창립되었고 2월 15일에 초대 교장으로 김정렬 중령이 임명되 었다. 마침내 6월 10일 제1기 사관생도 97명 이 김포캠퍼스에서 입교식을 거행하였다. 1949년 10월 1일, 육군으로부터 독립하여 창군된 공군이 새 출발함에 따라 학교 이름도 공군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 이때 초대교장이 었던 김정렬 장군이 공군참모총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이근석 대령이 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국전쟁 중에는 대구, 진해 등으로 캠퍼스를 임시 이전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1951년 7월 공사 1기생 83명이 졸업했다. 휴전 후 몇 년 지난 1958년 12월 12일 서울 대방캠퍼스로 이전하여 정착한 뒤 제7기생부터 33기생까지 26년간 2,800여 명의 사관생도를 양성하였다. 1985년 12월 21일에는 서울 대방동에서 지금의 청주로 캠퍼스 이전이 완료되어 정예 공군장교를 양성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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