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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묘는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고 묘비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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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그는 1919년 당시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3학년에 재학중 이었다. 그는 서울·평양(平壤) 등지의 만세시위 상황을 전해들은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採)·김영서(金永瑞) 등의 지도를 받아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등과 제휴하여 연합만세시위를 펴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여 준비를 갖추어 갔다. 드디어 1919년 3월 8일 거사일에 각 학교 학생들과 주동이 되어 대구 시내를 행진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날 대구의거는 영남 3·1독립운동의 효시가 될 뿐아니라 그 후에도 지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후 1928년 4월부터 1931년 3월까지 향리에서 농촌계몽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