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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장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이다. 정미 군대해산을 당하여 통분함을 금치 못하여 국권을 바로 잡고자 1907년 음력 10월경 동지 70여 명을 규합하여 거병하였으며, 대체로 광주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음력 12월경 광주군 묵동(墨洞)에서 일본 기병대와 전투하여 그의 부하 8명이 전사하였다. 1908년 음력 2월 중군장 오사과(吳司果)외 2명으로 하여금 광주군 언주면(彦州面)에 사는 박승호(朴勝浩)에게서 군자금 1백원을 거두고 그를 의병에 입대케 하였다. 또한 박승홍에게 돈 40원을 주어 경성(京城)에 가서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명하였는데 1908년 10월 11일 양주(楊州)에서 적에게 체포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일경에 노출되어 1909년 3월 23일 경성 공소원으로부터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남상목 선생은, 경기도 광주(廣州) 출신이다. 1907년 7월에 경기도 용인군(龍仁郡) 용천곡(龍泉谷)을 중심으로 의병 50여 명을 그 휘하에 두고 구식총(舊式銃) 40여 자루와 서양총 10여 자루를 무기로 하여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 후 새로이 의병진에 참여한 송주상(宋柱祥)·김태동(金泰東) 등으로 하여금 의진에 종사(從事)시키고 강춘선(姜春善)은 후군장(後軍將), 김경화(金景化), 이시영(李時永)은 포군(砲軍)으로 진용(陣容)을 재정비하고난 뒤 음성(陰城)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불행히도 분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패전군 30여 명을 이끌고 죽산(竹山)의 칠정사(七亭寺)에 도달한 뒤 전봉규(全奉奎) 휘하에 있는 100여 명의 의진과 진을 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나서 안성(安城)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과 다시 접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니 항일투쟁에 있어서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년 11월 판교(板橋)에서 살고 있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일제 앞잡이의 밀고로 인하여 "느릿골"이란 지역에 잠복해 있던 일본헌병에게 체포당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나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腸破裂)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