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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림은 미주지역에서 조직된 공립협회(共立協會),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등에서 활약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1907년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공립신보(共立新報)』발간에 참여하였고, 1909년 공립협회가 국민회(國民會)로 발전할 때 법무원의 임시대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 이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 지방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여 대한인국민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3년에는 흥사단(興士團) 함경도 위원에 선임되었고, 1919·20년 대한인국민회 지방위원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직접 출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금모집에도 힘을 쏟아 대한인국민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부에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그는 또한 1920년 노백린(盧伯麟)과 함께 캘리포니아 윌로우스[California Willows]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여, 자금을 제공하고 고문(顧問)으로 비행사 양성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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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임대는 황해도 은율(殷栗) 사람이다. 일찍이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서 공부한 뒤, 1909년 신천(信川)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사로 근무하였다. 1911년 11월, 일제가 민족지사들을 대거 탄압함으로써 국망(國亡) 초기 한국 독립운동의 근원을 차단하기 위해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 암살 기도로 조작해 낸 105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그 결과 1912년 9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모살미수(謀殺未遂)로 징역 7년을 받았으나 1913년 10월 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난 직후인 1914년 4월 무렵 미국으로 건너가 10월 21일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던 흥사단(興士團)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0년 2월에는 캘리포니아주 윌로스 지방에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과 김종린이 한인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할 때 참여하였다. 비행사 양성소에서는 1920년 5월에 비행기 2대를 사들여 미국인 기술자 1명, 한인 비행사 6인으로 교수진을 구성하였으며, 재학생은 19명이었다. 또한 학교 유지 운영에 소요되는 재정은 교포들의 특연(特捐)과 봉사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때 그는 노백린 교장 아래서 학생들을 통솔 감독하는 연습생감독(練習生監督)의 직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한민족의 장래에 독립과 번영을 가져다 줄 한인 최초의 이 비행학교는 설립 후 7개월만에 재정 악화로 폐교되고 말았다. 1920년 12월 말경에는 조국독립에 대한 의지를 실현하고자 켄터키 사립 사관학교(士官學校)에 입학, 군사 이론을 수학하기도 하였다. 1929년 1월에는 흥사단 미주위원부 이사부장에 선임되어 등사판의 「흥사단보」 간행을 주관하였다. 그 뒤 1944년 10월 28일, 미주와 하와이 각지에 있던 13개의 한인단체 대표가 회동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위원부 개조안 발표에 대한 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의 개조안을 통과시켰을 때 그도 이 회합에 참석하여 김원용(金元容) 등과 함께 대표원(代表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