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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남은 서울 사람이다. 1918년 일본 대판(大阪) 자동차학교를 졸업하고 적우비행기제작소(赤羽飛行機製作所)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익혔으며 소율(小栗)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조종술을 배웠다. 1921년 12월 일시 귀국하여 금강호를 타고 조선 상공을 비행하면서부터 자전거의 엄복동과 함께 천재비행사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교원으로 활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을 겪은 후 국내로 돌아와 1924년 말경 중국 안동현(安東縣)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5년 남방혁명군의 곽송령(郭松齡)의 초빙으로 곽송령 휘하의 육군 중장(中將)으로 임명되어 전투에 참전하여 전과를 세우는 등 중국혁명을 통한 민족해방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北京)의 풍옥상(馮玉祥) 군벌로 인해 남방혁명군의 북진이 수포로 돌아가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내에서 이상재(李商在)와 교분을 쌓은 그는 김동철(金東轍)과 함께 재차 중국으로 건너간 후 북평(北平)에서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6년에는 여운형(呂運亨)의 소개로 산서성(山西省)의 군벌 염석산(閻錫山) 군대에 참가하여 항공중장과 산서비행학교(山西飛行學校) 교장으로 사망시까지 비행사를 양성하였다. 1928년 음력 9월 중국 산서성(山西省) 태원부(太原府)를 근거로 최양옥(崔養玉)·신덕영(申德永)·김정련(金正連)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을 조직하는 한편, 이듬해인 1929년 비행학교 설립과 군자금 확보를 위해 최양옥과 김정련 등에게 600여 원을 제공하면서 이들을 국내로 잠입시켰으나, 최양옥·김정련 등이 경기도 마석에서 우편수송차량을 습격하던 도중 붙잡히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산서비행학교(山西飛行學校)에서 비행사 양성을 위해 비행교육 중 1930년 4월 2일 추락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