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age


10page

비행가 창으로 잠시 아래를 내려다봐 주십시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광경은 황해바다입니다. 푸른 황해의 물결위에 살낱처럼 하얗게 번지는 파도의 깃이 드러나 움직이는 듯 마는 듯 바다는 흐리지 않고 담겨있고 비행기 또한 마냥 그 위에 머무르는 듯만 합니다. 벌써 세시가 가까워졌습니다. 조국이 그 만큼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는 뜻입니다. 이 격정의 2시간동안 할 한마디없이 황해를 나는 우리들의 회포는 도리어 침묵으로 무겁기만 합니다. "아, 아, 보인다. 한국이!" 드디어 기창 밖으로 아련히 트인 초겨울의 황해가 푸른 잠을 자고 있는 게 보입니다. 그 광할한 푸르름 아래 거뭇거뭇한 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 조국의 땅이 우리를 맞으러 온다. 우리를 마중하러."
10page

눈에 띄지 않던 솜구름이 버섯처럼 돋아나 시야에 들어오고 그 밑에는 서해안 섬들이 바다에서 솟아나는 듯이 옹기종기 떠 올랐습니다. 옥색 하늘이 엷게 풀어지고 남색 바다가 치마처럼 퍼졌으며 섬들이 크고 작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수송기 기창에 조국이 가득합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여러분, 우리 광복군의 힘으로 일제를 물리치면서 상륙하고 싶었던 조국의 육지가 드디어 다가오고 있습니다. 비행기가 기수를 천천히 아래로 향하고 있습니다. 저 곳이 조국 땅 김포반도입니다.
10page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대위 장준하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석님, 국무위원님과 두 분 부장님, 참모총장님, 그리고 수행원 여러분, 오늘은 1945년 11월 23일입니다. 여러분이 타신 이 비행기 C-47은 오후 1시 정각 상하이 강만(江灣) 비행장을 떠나 김포 비행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조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27년 만에 환국하시는 김구 주석님을 포함한 탑승하신 여러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님, 부주석 김규식 선생님, 국무위원 이시영 선생님, 선전부장 엄항섭 선생님, 문화부장 김상덕 선생님, 참모총장 류동열 장군님, 주치의 류진동 박사님, 비서 김진동, 수행원 안미생, 민영완, 윤경빈, 이영길, 백정갑, 선우진, 장준하. 이상 15명입니다.
10page

밖을 내다보십시오. 비행기 창으로 푸른 하늘이 베어들고 있습니다. 저 너머에 조국이 있습니다. "벨트를 다 매주시오." 방금 미 공군하사관이 말한 대로 국방색 허리띠를 매어주시기 바랍니다. 모두 알다시피 이 수송기는 중국 국민당 정부 장제스(將介石, 1887~1975) 총통과 앨버트 코디 웨드마이어(Albert coady Wedmeyer, 1897~1989) 주중 미국 사령관의 주선으로 리드 하지(John Reed Hodge, 1893~1963) 주한 미군정 사령관이 보내준 것입니다. 조국에서 할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늦은 환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좀 더 빨리 돌아갈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어수선하다는 국내 정세를 좀 더 빨리 정리할 수 있었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