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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경찰의 혼 차일혁 총경 일대기 22 는 일념으로 그 고등계 형사를 흠씬 두들겨 패고 선생을 데리고 도망하려 했다. 그러나 그 선생을 구출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차일 혁만 쫒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2) 일제경찰은 차일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집과 학교 근처에 매복을 하고 감시하였다. 차일혁은 집에도 못 들어가고 학교에도 가지 못한 채 이리저리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정읍 본가에 잠시 들렀다가 상주해 있던 경찰들과 맞닥뜨린다. 차일혁은 정읍경찰서 형사들에게 붙잡 혀 경찰서로 압송되던 중, 포승줄을 끊고 도주한다. 3) 그는 고향을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북쪽으로 방향을 잡아 밤낮 을 걸어 전주 송광사까지 갔다. 차일혁은 주지스님에게 자초지종 을 설명했다. 눈이 맑고 의협심에 불타는 젊은이가 일경에게 쫒기 는 것을 불쌍히 여긴 주지스님은 그를 멀리 금강산 신계사4) 로 보 내준다. 차일혁은 16세의 나이로 고향과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금강 산까지 가게 된다. 금강산은 과연 명산이라 갖가지 형상을 한 기 암괴석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올라있고,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웅장한 풍광을 자랑하였다. 깊은 골마다 흐르는 우렁차고 맑은 물소리는 울분에 찼던 젊은 마음을 달래주 는 것 같았다. 차일혁은 신계사의 암자인 보문암에 머물렀다. 승 려들은 차일혁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절집의 불문율대로 허드 렛일부터 맡겼다. 그리하여 차일혁은 보문암에 머물며 밥 짓고 물 긷는 불목하니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참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팔청춘 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 2) 유족의 증언 3) 유족의 증언 4) 신라 법흥왕 5년(519년)에 창건됨. 장안사, 표훈사, 유점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 중의 하나였고, 이황, 이이, 김삿갓, 최익현 등도 이곳을 다녀간 유서 깊은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