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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역사의 부름 앞에 99 저수지에 벼를 가마니째 던져놓은 것은 공비들 나름의 저장방법 이었던 것이다. 주민들은 공비들로 인해 여지껏 추수도 하지 못한 채 들판에 버 려두었던 벼들을 추수하게 되었다. 봄이 되어서야 간신히 지난 해 벼를 추수하게 된 주민들은 기쁨에 넘쳐 벼를 거둬들였다. 이로써 주민들의 생활난이 거의 해결되었다. 또한 차일혁은 민경관계를 도모하는 마을 운동회를 개최하고 단순부역자는 모두 방면하였다. 이처럼 치안이 복구되고 민심이 수습될 무렵 상부의 허가증을 빌미로 잡상인들과 모리배가 대거 밀려왔다. 상·하 해리면은 전국 굴지의 소금산지였기 때문에 이들은 당시 금덩어리였던 소금을 빼앗아 검은 뱃속을 채우고자 하는 모리배들이었다. 군 특수기관, 반공단체 등을 사칭한 그들은 부역자들을 찾아가서 목숨만은 살 려 주겠다는 협박으로 소금을 강탈해갔다.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 이 아니라 내부에도 준동하고 있었다. 차일혁은 모리배들이 주민 들로부터 뺏은 소금을 되찾아 주민들에게 되돌려주는 한편, 모든 잡상인들과 외부인사들을 지역 내에서 쫓아버렸다. 차일혁의 18대대의 진주 이래 공비들도 사기가 떨어져 비무장 대원을 하산시키는 한편, 매일 90여명의 자수자가 속출해왔다. 용 강로 군단장 신 某는 대원들을 전부 해산시키고 칼빈 1정을 휴대 한 채 26일 산장지서에 자수해왔으며, 문화 중대장 조 某 등 수많 은 귀순자들이 지서에 밀려들고 있었다. 1951년 3월 30일. 차일혁 부대는 새벽을 기해 방장산에서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화천봉을 넘어 영암, 도솔암, 선운사 등을 지나 능선을 타고 계곡을 넘으며 일대 산악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하오 3시경 오른쪽에서 공격을 하던 1중대가 소요봉 중턱에서 약 50~ 60명의 적을 발견하였다. 차일혁은 전 화력을 집중시켜 적을 해안 까지 밀어붙였다. 당황한 적들은 해안까지 도망하다 갈 길을 잃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