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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 다솔사(多率寺)에 대하여..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인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절이다. 다솔사의 역사는 '곤양 지리산 영악사 중건비'에 기록되어 있는데 부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남쪽 바다에 닿아 있는 곤명은 그 진산을 지리산으로 하는데, 수백 리 흘러 곤명 북쪽에 봉우리를 맺은 봉명산에 절을 세웠다. 문창후 최치원과 지영·능민 두 스님이 거닐며 즐기던 곳이다. 신라 지증왕 4년 계미년 (503년)에 절의 역사가 시작됐으며 이름을 영악사(靈嶽寺)라 했다. 선덕여왕 5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중창(重)하여 다솔사(陀率寺)라 했다.' (중략) 다솔사(多率寺)는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대장군이 나오는 터이다. 아래 소나무 길을 통해 걸어 올라오다 보면 오른편에 어금혈 봉표(御禁穴 封標)라고 적혀 있다. 이는 어명으로 다솔사에 묘자리를 금지한다'는 의미다. 1890년 당시 지역 유지가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좋다는 말을 듣고 무덤을 만들려 하자 스님과 지역민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이 그 뜻을 받아들여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 다솔사를 포함한 봉명산 일대에는 많은 인재가 나고 거쳐 갔다. 특히 불의에 맞서 일본에 항거한 승려와 지식인이 이곳을 본거지 삼아 항일 활동을 펼쳤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다솔사를 승병기지 삼아 의병 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적멸보궁 오른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물며 수도한 곳이다. 만해뿐 아니라 김법린(1899~1964)과 최범술(1904~1979)이 이 곳을 기점으로 독립운동과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소설가 김동리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적멸보궁 아래 안심료에 머물며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