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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한제국 융희 4년) 일제는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의 국권을 침탈했다. 그 뒤 일제는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각 분야에서 한민족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수탈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일본의 폭압적이고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기 위한 항일민족운동이 3.1만세운동으로 꽃을 피웠다. 1919년 3월 1일 한용운을 비롯한 민족대표들은 조선의 독립을 만천하에 알리는 독립선언을 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국내 230여 곳에서 202만여 명이 대규모 독립만세시위를 벌였고 시위의 횟수는 2,500여 회에 달했다. 일제는 한민족의 정당한 독립운동을 총칼로 진압하려 했다. 화성 제암리 등에서는 주민을 집단적으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수많은 사람을 가두고 가혹한 고문도 서슴지 않았다. 3.1운동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은 7,500여명에 이르렀고 다친 사람은 15,000여명, 체포되거나 구금된 사람은 46,000여명이 넘었다. 한편 독립만세시위는 사천시 사남면 우천에서도 일어났다. 일제에 대한 항거를 준비하고 있던 김관일, 김주봉, 김기범, 문종석, 문명표, 김수명, 김또정일, 김몽우, 김재상, 김덕우, 김장언, 곽성삼, 곽응삼, 곽의삼, 문득용, 문석표, 문장표는 1919년 4월 중순경 터골산에서 일본 기마 헌병 3명이 능화마을앞 대로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그러자 일본 헌병은 17명 전원을 체포하여 사천읍 헌병대로 연행한 뒤 잔악한 고문을 15일간이나 자행했고, 이들은 초죽음의 상태에서 겨우 석방되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바친 용맹한 선조의 업적을 기리고 이러한 선조의 높은 뜻을 후대의 모습으로 삼고자, 사천시의 협조를 받아 이 비를 세운다. 2016년 12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