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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읍성(泗川邑城) 경상남도 기념물 제144호 /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인리 읍성은 지방의 관청과 민가의 보호를 위해 그 주변을 둘러싼 성이다. 읍성을 가장 활발히 쌓은 시기는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고려 말로부터 조선 초까지였다. 이 시기에 왜구의 침범이 잦았기 때문에, 세종(世宗, 1418∼1450 재위)은 경상도(慶尙道) 전라도(全羅道) 충청도(忠淸道)의 바다 가까운 지역에 새로 읍성을 쌓거나 수리하게 하였다. 읍성은 조선 왕조 마지막까지 존속되었으나, 1910년 한일합병과 함께 일본이 읍성 철거령을 내리면서 전국의 읍성 대부분이 헐렸다. 사천읍성은 1442년(세종 24)에 당시 병조 참판(兵曹 參判)이었던 신인손(辛引孫)이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돌과 흙을 사용하여 쌓았다.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913m, 높이는 3~3,5m로, 성문이 세 곳에 있었다고 한다. 성문에는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는 낮은 담[雉城, 성가퀴]을 설치하였고, 입구에는 'ㄱ'자 모양의 또 다른 성[甕城]을 마련해 외부로부터 성문을 엄폐하였다. 또 외부로부터의 접근을 막기 위해 방어용 도랑[垓字]를 설치하는 등,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읍성 구조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허물어지고 약 300m 정도의 성벽만이 훼손된 채 여기 저기에 남아 있다. 이 성은 1597년(선조 30)의 정유재란 때 치열한 전쟁을 벌인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듬해 9월 28일에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지휘 아래 있던 조 명 연합군(朝 明 聯合軍)이 성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이 성을 탈환하였던 것이다. 현재 이곳 사천읍성 일대는 수양공원(洙陽公園)으로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