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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방법원에서 저격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열렸다. 김시현은 사실심리에서 암살시도 동기를 묻는 재판장의 질문에 “이 대통령은 독재자이며 정실인사를 일삼을 뿐만 아니라 민생문제를 해결할 역량도 없다”고 답한다. “6·25 발발 6개월 전부터 북한은 전쟁준비로 분주했음에도 정보에 어두웠다는 것은 정부의 직무유기”이고 “개전 이튿날 방탄차를 타고 도망가면서 백성들에게는 안심하라고 뱃속에도 없는 말을 하고 한강 철교를 끊어 시민들의 피란을 막았으면 국가원수로서 할복자살을 해도 용납이 안될 판에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으니 어찌 대통령이라 하겠는가”라며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또 “국민방위군사건·거창양민학살사건 등으로 민족 만대의 역적이 된 신성모(申性模·1891~1960·전 국방장관)를 죽이기는커녕 되레 주일대사를 시키는 그런 대통령을 그냥 둘 수 없었다”며 “암살 후 누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둔 사람은 없으나 누가 하더라도 이승만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말한다. 당시 김시현은 자신은 30년간 조국광복을 위해 살인·파괴를 해 온 사람이라고 강조하며 70세의 노인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정정한 기력으로 명쾌하게 응수했다고 전한다. 유시태는 법정에서 “이승만 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서 권총 탄환을 일부러 물수건에 적셔 두었다가 불발탄으로 만들었다”고 진술, 살해의사가 없었음을 주장했다. 하지만 4·19혁명 이후 석방될 때는 “그때 권총이 발사되기만 했더라면 이번에 수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지 않았을 터인데, 한이라면 그것이 한이다”라고 출소 소감을 밝혔다. 두 사람은 53년 12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이듬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하다 60년 ‘4·19 혁명’ 후 과도정부에서 국사범 제1호로 출소했다. 출처 : 독립유공자 유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