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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의 유생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한 그는 1908년 대구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는 경성공업전습소 염직과를 다녔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19∼1920년 무렵 비밀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하였다. 이 무렵 그는 안상길 등과 함께 임시정부 자금모집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던 중 1921년 1월 조선독립단의 문서를 전달하다가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운형·김규식 등과 함께 조선노동대회 대표자 자격으로 참가하였다. 이후 1923년 5월 꼬르뷰로(高麗局:조선공산당 중앙총국) 국내 파견원으로 선임되어 입국한 그는 신철과 상해파의 이봉수, 조선노동연맹회의 윤덕병·신백우, 북성회의 김약수, 무산자동맹회의 원우관 등과 함께 꼬르뷰로 국내부를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리고 1923년 7월에는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신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돌며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강연을 통해 일반 대중에게 계급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조직확대를 위해 각 지역의 기존 단체들과의 연대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1925년 4월에는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가 지도하던 ‘제1차 조선공산당’은 조동호와 조봉암을 코민테른에 파견하고, 조선노동총동맹을 분리시키는 등의 대내외적인 활동을 하다가 동년 11월 ‘신의주사건’으로 그 조직이 일경에 발각되고 말았다. 김재봉은 12월에 검거되어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