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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모 선생은 1883년 9월 20일 장수 이씨 태신공의 셋째 아들로 설천면 남양리에서 태어난 분인데 성품이 후덕하고 학식이 깊어 인근에 인망이 높았다. 일제가 무력으로 나라를 빼았아 포학무도한 식민 정책을 베풀자 이에 분개한 선생은 국권회복의 기회를 살피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분기 4월 2일에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가지고 와서 그 날 밤에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외 여러 동지들과 의논하여 독립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하고 각 부락 동지들과 서당 학생들을 지도하여 4월 3일에 설천면 남양리 노상에서 많은 군중을 모아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정순조에게 큰 태극기를 들게 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남해읍으로 나아가다가 날이 저물어 일단 해산하고 익일 남해 장날인 4월 4일에 모두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장꾼을 가장하여 시장으로 나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오후 세시경에 태극기를 꺼내 일제히 독립만세를 불러 약 1000명의 군중으로 하여금 함께 독립만세를 연창 절규하게 하니 남해 강산이 진동하는 듯 하였다. 이어 지사들로 하여금 군청 보통학교 등 주요 기관에 뛰어들어 군수 순사 금융조합 이사, 기타 관리들에게 독립만세를 억지로 부르게 하고 경찰 주재소에 가서 유치인의 석방을 요구하게 하였다. 뒷날 일본 군대의 출동으로 선생을 비롯한 주동 인물 23명이 일경에게 붙잡혔는데 이 때의 선생은 38세의 장년이었다.이 의거로 선생은 2년간의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 조국 광복 후 선생은 남해 향교의 전교직을 역임, 지방 유림을 이끌어 향토 교화에 힘쓰다가 1954년 10월 10일 향년 72세로 별세하였다. 함께 묻힌 배위 인동 장씨는 선생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어려운 뒷바라지와 자손 양육에 힘쓴 현부인이었는데 1960년 2월 23일 향년 72세로 별세하였다. 나라잃은 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