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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찬숙 선생은 문화류씨 대승공의 삼십이세손 성화공의 둘째아들로 1891년 9월 9일 설천면 모천마을에서 태어났다 총명하고 성품이 강직하였으며 한학에 통달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이 강압으로 나라를 합병하고 폭정을 하게 되자 선생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잃어버린 나라를 기어히 찾겠노라 굳게 다짐하였다. 1919년 2월 고종황제가 승하한 궁전 앞에서 참배하고 나라잃은 설움과 호아제 잃은 슬픔으로 애끓는 분노를 참을 길없어 황황히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정순조 외 10여명의 한학자 크럽을 형성하여 독립운동은 은밀히 진행되었다. 동년 3월 1일 ㅅ울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니 이에 호응하여 4월 1일 설천면 문항리 앞 신작로에서 백여명을 모아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정순조는 대장기를 정임춘 정흥조 윤주순은 중형기를 휘날리고 정학순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선생은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였으니 그 함성은 금음산에 매아리쳤다. 이것이 남해군 3.1독립만세의 시발점이자 발화점이기도 하다. 선생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남해읍 장날인 4월 4일 하오 2시경 장터에서 품었던 태극기를 꺼내 합세한 군중 천여명으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함께 외치니 천지가 진동하였다. 남해경찰서 주재소가 삼엄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나 맨앞에 나선 선생이 이놈들아 만일 발포하여 우리 동지 한 사람이라도 쓰러지면 너희들 가족 모두 살아남지 못하리라 고함을 지르자 왜경들은 총을 던지고 순순히 굴복하였다. 여세를 몰아 유치장에 뛰어들어 도끼로 문을 부수고 유치인 전원을 석방한 다음 왜경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케 하였다. 훗날 일본 헌병대의 출동으로 23명 모두 체포되어 선생은 2년간의 모진 옥살이를 치렀다. 옥고로 인한 병환은 점차 악화되어 집에 들어온지 몇일만인 1929년 5월 3일 35세로 그리던 광복을 보지도 못하고 한을 품은채 억울하게도 짧은 일생을 마쳤으니 인근 사람들은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으며 산천초목인들 어찌 슬퍼하지 않았으랴. 배위 정숙애 여사는 1890년 9월 8일 진목리에서 출생 1968년 1월 6일 일본에서 79세로 별세하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