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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춘 선생은 진양정씨 첨정공의 24대손 철근공의 둘째 아들로 1890년 5월 20일 설천면 문항리에서 태어났다. 천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한학에 달통했다. 일본이 강압으로 나라를 합병하고 폭정을 하게 되자 선생은 통분을 참지 못하여 구국 운동을 벌이고자 향당 유지들을 설득하여 기회를 보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매 이에 호응하여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이예모, 정익주, 하준호 외 여러 사람과 힘을 모아 궐기를 하기로 하여 각 부락을 순회하면서 동지를 규합하고 서당의 학생들을 지도하여 3월 3일 설천면 남양리 노상에서 군중을 모아 독립선언서는 이예모가 읽고 태극기는 정순조가 들도록 하여 모두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으로 진군하다가 날이 저물어 중도에서 해산하고 익일 남해 장날인 4월 4일에는 모두를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장꾼을 가장하여 시장으로 나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오후 세시경에 태극기를 꺼내 일제히 만세를 불러 약 1000명의 군중으로 하여금 독립 만세를 함께 절규하게 하니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았다. 선생을 비롯한 주동자들은 군청 보통학교 기타 주요 기관에 몰려가서 군수 순사 금융조합 이사 기타 관리들에게 억지로 독립 만세를 부르게 하고 남해 경찰 주재소에 가서 유치인의 석방을 강요하였다. 뒷날 일본 군대의 출동으로 선생을 비롯한 주동 인물 23명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는데 이 때의 선생의 나이는 30세였다. 이 의거로 선생은 2년간의 모진 옥고를 치렀다. 조국 광복 후 선생은 향토 발전에 힘을 기울이다가 1956년 8월 21일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함께 묻힌 배위 장수 이씨 운악 여사는 1887년 11월 15일에 출생 1978년 8월 15일 91세로 별세하였는데 고락을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