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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윤주순 선생의 묘소 안내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1919년 4월 3일·4일에 걸쳐 남해읍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4월 2일 설천면 문의리(雪川面文義里)에 사는 이예모(李禮模)가 하동(河東)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하여 귀향하면서부터 계획되었다. 그는 정순조(鄭順祚)·정몽호(鄭夢虎)·정학순(鄭學淳) 등과 함께 이예모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서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서당 학생과 인근 주민들에게도 이 계획을 알리고 참가를 권유하였다. 4월 3일 오후 3시경, 그는 많은 시위군중과 함께 남양리(南陽里) 노상에 모여 이예모가 독립선언서를 낭독을 마치고,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을 향하여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열이 고현면(古縣面)에 이르렀을 때, 면장 김치관(金致寬)이 많은 시위군중의 위세에 놀라 이 사실을 경찰주재소에 알리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김치관이 밀고한 사실을 안 시위대는 명일의 남해읍 장날을 이용하여 다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약속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4월 4일 아침 일찍 그는 장꾼으로 가장하고 남해읍 장터로 나아갔다. 장꾼이 1천여명으로 늘어난 오후 3시경,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군청·우체국·학교·주재소에 뛰어들어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泗川)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는 이 사실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伊於里)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9월 23일 대구(大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