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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화리의 연혁 및 유래 동국여지승람에 1481년 갈곶포 경남지리지에 1770년 갈곶포 1832년 이전에는 회옹촌리 1832년 이후에는 옹촌리로 명명됨. 근세 조선시대의 동명은 갈구지이며, 소백산맥의 땅 끝이 바다로 흘러 남해도의 서북단 갈화리의 큰 끝으로 이어져 사학산이 형성되었고 남해도와 육지가 이어지는 땅의 끝이라는 뜻이다. 1913년 일정초기에 갈화리로 개명되었고 사학산의 정상상에서 내려다 볼 때 칡꽃(葛花)과 같은 형태로 큰끝과 어실끝이 여타 제 섬들과 해안의 굴곡상태가 잘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여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다. 조선조 중엽부터 김해김씨 나주임씨가 최초로 입주하여 살았다고 구전되어 왔으며 이후 거창유씨 김녕김씨 등 20여 성바지가 입주하여 “우리 남해 갈구지 사람살기 좋다”는 민요가 서부 경남, 동부 전남 일원에 널리 퍼져 남해 제일의 큰 마을이 형성되었다. 한말(1850년대) 김치섭씨가 집강으로서 마을을 다스렸고 이어서 황석지 김보홍 한상백 차진섭 한정섭 유용표 김정학씨 순으로 일제말 1945년까지 구장과 이장으로서 마을을 선도 소임을 다하여 왔다(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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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이 남긴 유적 ● 천연기념물(276호) 장자나무와 큰 샘이 있다.(1720년경) 약 300년 전 유동지 할아버지가 논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흙 손발을 씻고 서로 담소하고 대화할 수 있는 휴식처가 없어 고심 끝에 들의 중심지이며 흐르는 냇물과 맑은 샘물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현 장소에 느티나무를 심어 성인 일곱 사람의 아름드리 대목으로 성장시켜 천연기념 276호로 지정되어 있다. ● 큰샘이 마을 남쪽 약 50미터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갈화민의 유서 깊은 우물로 갈화 마을이 생기게 된 근원이다. 현재의 상수도 설치 이전까지 300호 동민이 유일하게 이 샘물을 먹고 살아왔다. 화강암 바위 틈에서 샘솟는 물줄기를 발견하여 300호 주민의 식수로 쓸 수 있도록 6척 사방의 샘을 파고 대형 석재를 사천, 곤양 땅에서 구하여 사괘를 짜서 축조하였으며 석조의 형태와 수량으로 볼때 군에서도 자타가 비견할 수 없는 전 갈화민의 조상이 남긴 원천이며 조상의 유지가 천세토록 불절 도이야 할 큰 샘이 있으나 오늘의 상수도와 지하수 개발로 폐정되어 있으니 후손으로서는 안타까운 심정 금할 길이 없다. 계사년 2013년 3월 갈화 주민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