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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일제 침략으로 민족적 국운이 기울어진 때 이 고장에서 태어나 항일운동으로 민족의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위인이 있으니 바로 창남 윤병호 선생이시다. 자는 택현 호는 창남 본관은 파평이고 1889년 8월 5일 이 고장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출생 1908년 민족학교인 보성전문학교에 진학 자유 정의 진리의 교육을 받으면서 나라를 되찾고자하는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으며 독립운동의 이론을 탐구코자 도일 조도전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유학 1915년 졸업과 동시 귀국 단군봉사를 통하여 구국하기 위한 국권회복단조직에 가담 상해임시정부의 자금조달을 목적으로하는 백산상회 설립에 참여 운영하던 중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국권회복단 동지들과 경남 창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진동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는가 하면 1920년 동아일보 창간발기인 1929년 조선어연구회 가입 등 언론과 조선어로 민족운동에 활약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함흥 감옥에서 1년여 옥고를 치렀다. 향토를 사랑하는 마음도 지극하여 1947년 재부산남해향우회를 창립하여 회장을 10대까지 연임하였고 1954년 고향 남해에서 무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국회호헌지회의 대표간사로서 이승만대통령의 삼선 개헌에 반대하는 깃발을 들고 서울 가두시위에 앞장서 독재정권을 막는 민권운동에도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민주당경상남도당위원장과 민주당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선생은 그 장대한 체구 영청 옥결 같은 고귀한 용모 선각자의 인품과 기개 등 이곳 향토가 낳은 혜성같은 위대한 애국지사로 숭앙받다가 1974년 7월 13일 향년 86세로 생을 마감하여 향리에 영면하셨다. 조국과 후세에 남긴 선생의 빛나는 독립유공가 애향심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남해인의 온 마음을 모아 3.1 독립만세의 함성이 있은지 80년 째가 되는 이날을 기하여 남해의 관문인 노량공원에 이 비를 세우다. 김일두 글을 짓고 1998년 3월 1일 독립지사 윤병호 선생의 비 건립위원회 회원 일동이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