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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담사 만해기념관을 열며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의 출가 사찰이자, 위대한 만해정신의 산실이다. 이 러한 백담사에 민족의 자랑이요, 거례의 큰 스승,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유묵과 자료를 한자리에 모은 만해기념관을 개관함은 우리의 크나큰 자랑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가 조국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크고 뚜렷하다. 그는 굳은 지조와 대쪽같은 정절로 민족정기를 만방에 떨친 독립운동가이며, 사랑의 증도가(證道歌)를 노래한 님의 시인이 다. 또 불교의 대강백·대선사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인가 하면 시인이요, 시인인가 하면 대사 상가요, 대사상가인가 하면 어느새 독립운동가로 변해버린다. 그 어느 한 면만으로 만해 한용운 선사를 이해할 수는 없다. 어느 것에도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과 이미 하나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 선사는 무엇이라고 정의내리면, 이미 그 세계를 뛰어 넘어있다. 단(斷)과 상(常)을 여읜 무변(無邊)의 자리에 다시 우뚝 솟아 중정(中 正)의 도(道)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만해 한용운 선사의 철학과 예술과 나라 사랑의 큰 정신이 깃들어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향리에서 한응준 공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서당에서 한학(漢學)에 몰두하며 민족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닦았다. 그는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어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오세암·건봉사에서 정진하여 불제자로서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1910년 한·일 불교 동맹조약 체결을 분쇄하고, 그 후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7년 12월 설악 산 오세암에서 참선하던 중 문득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다. 1919년 3·1운동의 선봉에 서서 행동강령으로 〈공약 3장〉을 첨가하고, 옥중 독립선언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발표하였다. 그 후 민립대학 설립운동(1923), 사랑의 중도가 〈님의 침묵〉 발행(1926), 신간회 조직(1927), 광주학생의거 지원(1929) 등을 통하여 민족혼을 고취하는 한편, 항일의 선봉에 섰 다. 1933년 서울 성북동 총독부를 돌아 앉은 북향집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조선인 학병지원, 창씨개명 등의 반대운동을 벌였다. 1944년 6월 29일 조국광복을 한 해 앞두고 향년 66세로 한평생을 마감하니, 선사의 일생은 민족의 자존성 바로 그것이었다. 육신(肉身)은 가도 그 법신(法身)의 향기는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 백담의 뜰에 가득 넘쳐 나리라. 선사가 남긴 주요 저서로는 〈한문독본〉(1912), 〈불교유신론〉(1913), 〈불교대전〉(1914), 〈정선강의 채근담〉(1917), 〈십현담 주해〉(1926), 〈님의 침묵〉(1926) 등이 있다. 또 〈유심〉(1918), 〈불교〉(1931), 〈신불교〉(1937)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고, 〈흑풍〉, 〈박명〉, 〈죽음〉 등의 소설, 많은 한시 작품과 〈조선청년에게〉 등의 논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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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선사 연보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1905년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 1910년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여 불교 개혁을 주장함. 1914년 팔만대장경의 요점을 정리한 〈불교대전〉을 편찬.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선중 오도송을 남김. 1918년 월간 종합 교양 잡지 〈유심〉을 창간. 1919년 3·1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서에 행동 강령으로 공약 3장을 첨가. 3월 1일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 투옥 후 옥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발표 19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주도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 1926년 〈십현담 주해〉, 〈님의 침묵〉 발행. 1927년 신간회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 지부장에 피선. 1933년 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하여 서울 성북동에 북향집 심우장을 짓고 주석. 1940년 창씨개명, 징병, 학병 출정 반대운동 전개. 1944년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 1962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