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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사의 휘는 재년(在年)이요. 1929년 1월 29일 돌산읍 금성리 작금에서 신안주씨 26세손 순지(順之)님의 셋째로 태어났다. 1939년 4월 돌산국민학교를 입학하고 1943년 3월 돌산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청년과 처녀들의 강제징용과 온갖 수탈 등으로 민심은 뒤숭숭했다. 이러한 시기의 식민지 현실에 어린 나이의 열사는 민족적 의분을 느꼈으며 1943년 9월 23일 열사는 율림리로 가는 도로 목화밭 석벽에 각각 조선일본별국(朝鮮日本別國) 조선과 일본은 다른나라다. 日本局度マケ(일본국도마케 : 일본국도 졌다) 朝鮮萬歲(조선만세) 朝鮮之光(조선지광 조선의 광복한다) 스무자를 새겨놓았다. 이 일로인해 일본경찰은 글을 새긴 사람을 잡기 위해 마을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하자 마을을 위해 자진해서 "내가 했다."라고 늠름히 시인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이르자 1944년 1월 21일 구금 117일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그해 4월 8일 열넷의 어린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열사의 유해는 목화밭 근처에 안장되었다가 여수시가 신청한 독립유공자 포상신청에 정부의 건국훈장애족장 추서로 이곳 선상에 묘소를 이장하여 새롭게 안치하였다. 2012년 11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