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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홍(吳宇鴻)은 1930년 2월부터 1933년까지 전남 여수(麗水)에서 독서회를 조직하고 적색노동조합준비회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오우홍은 여수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4월부터 1931년 6월까지 서울 중동학교 특과, 여수공립수산학교, 일본 대판(大阪) 관서공업학교(關西工業學校)를 다녔으나, 모두 중도 퇴학하였다. 여수수산학교 재학 중 「프롤레타리아 경제학」·「전기(戰旗)」 등의 선전물, 잡지 등을 탐독하면서 신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930년 2월 오우홍은 여수보통학교 출신으로 조직된 독서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독서회는 유산자와 무산자의 모순과 불평등한 사회제도를 타파하고자 조직한 단체였다. 이를 통해 회원 스스로 신사상을 연구하고 일반 대중에게 선전하여 계급의식을 함양시키고자 하였다. 오우홍은 1930년 8월 동지들을 회합하여 독서회와 동일 강령·목적을 갖는 여수사회과학연구회(麗水社會科學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수회에 걸쳐 모임을 갖고 이론연구 및 그 조직 확대에 협의하였다. 그 결과 1931년 1월 연구회를 해체하고, 여수청년전위동맹(麗水靑年前衛同盟)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도 앞의 조직들과 같은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사회과학연구회와 청년전위동맹에서는 선전 문건을 작성하여 여수시내에 있는 각 학교에 배포하였고, 또한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비밀결사 독서회를 조직하고 1931년 11월에는 동맹파업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32년 7월 오우홍은 여수읍 의암산(義岩山)에서 동지들과 프로핀테른의 9월 테제를 바탕으로 노동대중을 기초로 산업별 계통에 의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여수적색노동조합준비회(麗水赤色勞動組合準備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부인노동부의 책임자가 되어 노동자의 의식 함양과 권리보호를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2월 오우홍은 여수청년회관에 사회과학도서부를 설치하고 신사상 지도연구에 힘썼다. 그러나 1933년 7월부터 일제의 감시가 심해져 7개월 동안 전라남도 경찰부 고등과와 여수경찰서가 합동으로 조선공산당재건 전남연맹과 여수적색노동조합 관련자 80여 명을 검거하였다. 오우홍을 포함한 여수적색노동조합 관련자 20여 명은 취조를 마치고, 1934년 1월경에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치되었고, 일본 사상검사에게 취조를 받은 후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오우홍은 1936년 6월 29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 2년 통산)을 받고, 다음날 광주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