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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음을 틈타 빠져나왔다. 한편 조·명 연합함대에 포위된 소서행장을 구하여 함께 귀국하기 위해 고성에서 남해 노량 앞바다로 급히 달려오던 도진의홍(島津義弘)의 1만 2천여 명(오백여척)과 11월 19일 새벽부터 벌어진 노량해전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고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셨고, 임진·정유 7년 전쟁은 승리로 끝났다. 우리 수군과 명나라 진린(陳隣) 도독 휘하의 장졸들은 장군의 유해를 고금도에 모셨다가 아산으로 이장하였다. 숨 가쁜 전장터인 남해 노량 동산에 처음 묘를 썼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방답진(돌산) 군사들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전라좌수영 수군의 선봉으로 용감하게 싸워 크게 이겼다. 돌산에서는 전쟁물자 조달을 위하여 남녀노소 밤낮없이 바빴다. 이순신 장군이 경상도에서 피란 온 사람들을 구제하고 군량미 확보를 위하여 둔전을 설치하여 농사를 짓고 살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 이순신(李純信) 첨사는 34대 전라좌수사도 하셨다. 이런 조상들의 정신과 전통을 이어받아 구한말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의병과 항일운동가를 배출한 충효의 고장이다. 여수읍에 사는 김백평 선생은 3.1운동 때 경기중학교 대표로 활약했다. 화양면 윤형숙 열사가 광주서 만세운동하다 왼팔이 잘렸다. 광주학생운동 지도자 노병주 선생과 독서회사건 등등 여수와 돌산의 젊은이들이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저항운동을 공유하며 활동한 분들이 많았다. 돌산 출신으로 노병주, 오우홍, 김인식 선생과 15세 소년항일운동가 주재년 열사가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을 받았다. 근세 돌산읍의 역사는 이성계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세우자 여수현감 오흔인이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 태조 5년에 함락되면서 여수와 함께 폐현되었다. 1896년 2월 3일 돌산군이 복군(復郡)되어 군내리에 돌산군청이 자리 잡았다. 여수군은 1897년 5월 16일에 복군되었다. 일본제국에 강점당한 1914년 3월 1일 여수군과 돌산군이 통합되어 여수군 두남면(斗南面)이 되었다가 1917년에 돌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49년 8월 15일 여수군 여수읍이 여수시가 되고 나머지 9개 면(面)들은 여천군으로 편입되어 여천군 돌산면이 되었다가 1980년 12월 1일 돌산읍으로 승격되었다. 여수 세계 박람회를 개최하여 국제해양관광레저스포츠수도를 만들자고 1997년 9월 9일 전국 최초로 주민발의에 의한 3여(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통합운동이 성공하여 1998년 4월 1일 전남 제1도시가 되고 통합 여수시 돌산읍으로 되었다. 2012년 4월 8일 여수시장 김충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