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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 일대기 애국지사 백산 문승수 선생은 국운이 기울던 1905년 1월 21일 전남 완도군 군외면 대아리에서 강성군 문익점 중시조의 19대손으로 뮨양준과 경주이씨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으나 세살때 부모님을 여의고 통정대부이자 사관울 지낸 바 있는 백수 문학서 조부의 지극한 사랑속에 타고난 기상 총명하였으며 어릴적부터 신동이라 불리었다. 1923년 완도 공립보통학교를 5년 수료하고 광주농업학교에 입학 우수한 성적과 함께 매사에 적극적이고 수철하며 용맹한 성격을 지녀 나라잃은 이땅의 젊은이로서 그 서러움과 울분을 참지못하여 1926년 11월 3일 광주고보의 왕재일 장재성 최규창과 광주농고의 박인생 정남균 문승수등 주동자 익에 두 학교학생 임주홍 김광용 정종석 정동수 정우채 김한필 안종익 김창주 채영석 국군엽등 16명이 모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뿌리였던 성진회를 조직 주도하여 민족혼을 일깨웠으며 조국 독립쟁취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며 투쟁하였다. 그 후 비밀누설의 우려와 전략상 1927년 3월 일시해체하고 학교별로 비밀결사 조직을 강화하고 그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1928년 2월 11일 고보의 임주홍 농고의 문승주 사범의 이동선등 3개교 학생 13명이 모여 졸업후에도 상호 긴밀히 연락하고 독립운동을 계속하기로 굳게 결의하였다. 1928년 3월 수석졸업을 하고 완도 약산사랍보통학교에 재직하면서 야학과 독서회까지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던중 1928년 11월 3일 광부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 조종과 주동으로 일경에 피체되어 1930년 10월 27일 광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6월의 중형을 언도받아 골육이 무너지는 참혹한 고문을 겪으며 복역중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하여 미결 1년 8개월만인 1931년 6월 13일 징역1년이 언도되어 북역하였다. 선생은 혹독한 옥고를 치른후 다시 1932년 동양척식회사의 수탈에 저항 전남운동협의회를 조직 그 산하에 농임조합건설위원회를 만들고 그 재정 책임을 맡아 활동하면서 야학가 독서회, 농민계몽, 소작쟁의등 사회운동을 통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4년 2월에 전남?의회의 탄로로 동지들과 피체되어 모진 고문과 옥고를 격고 미결 3년만인 1936년 12월 28일 목포지법에서 1년6월형을 확정받고 복영하였다. 피끓는 청춘과 꿈도 모두 접고 오로지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치시고도 1950년 56세를 일기로 한많은 짧은 생애를 마칙셨으니 그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82년 건국포장 애국장을 추서하고1988년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1묘역에 부인과 함께 안장되어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피맺히게 염원하고 계시니 육체는 사라렸어도 고귀한 애국혼은 이 나라 이 겨레의 독립, 자유와 정의를 위해 살 한점 피 한방울 남김없이 불사르고 평생을 싸우시다가 가셨으니 후대에 귀감이 되고 만고에 피어날 민족의 빛이기에 천고절의 애국심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고향 산자락에 추모비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