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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내호 강정태 최형천 백태윤 신동희 송기호 최홍길 정창남 김형곤 김남곤 문남균 김병섭 박득수 선생과 외래의 이시완 김창선 빈광국 강경환 황의보 박영희 이호견 강순저 주진 선생은 중화학원과 사립소안학교에서 항일투사를 양성하는 교육사업의 중심이었으며 박기숙 김통안 이갑준 박채신 이각재 김민곤 김제은 김수천 백성안 부찬옥 정해성 황봉두 선생 등은 夜學 운동의 중심이시었다. 소안선열들은 거족적 항일운동에도 앞장 섰으니 기미 3.1운동때는 3월 15일 완도읍에서 송내호 정남국 최형천 신판희 김경천 강정태 백태윤 선생 등이 나봉균 선생 등과 제휴 만세시위를 주도하시었고 1925년 이래 일본에서는 재일조선노동총동맹 위원장 정남국 선생 중심으로 정창남 위경량 이월송 김종호 김창윤 이수산 신봉채 김장안 이형인 김석동 이윤연 김영식 이장백 김수천 고산 김홍문 김영안 선생 등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하시었으며 1927년 신간회 조직 시에는 송내호 선생께서 중앙상무 간사직을 맡아 민족지도자로서 크게 활약하셨고 지방조직에서는 임재갑 나봉균 오석균 신준희 강정진 최형천 선생 등이 지도적 임무를 수행하시었다. 1929년 광주학생사건때는 정석규 이명지 선생 등이 주동적 역할을 하셨으며 이월송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주화대표단에서 활약하셨고 김장균 선생은 광복군에서 싸우다가 해방을 맞이하셨으며 김명길 선생은 왜경과 맞싸우다가 통분하게 순국하시었다. 이러한 줄기찬 항일운동은 2·30대 청년동지들의 순국과 감옥이 생활의 전부였던 선열들의 불굴의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800여명이나 되는 면민들이 불령선인으로 억압받으면서도 끝내 항일독립정신을 잃지 아니하였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항일투쟁의 기록이 있던가! 암울했던 시절 소안인들은 「도명은 소안이나 불안이오 산명은 가학이나 학불래」라고 읊조리며 망국의 한을 달래기도 하였으나 일제의 압제가 심하면 심할수록 저항의 결의는 더욱 굳세게 다져 조국의 운명을 지켜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