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page


388page

소남 김영현. 교육가, 사학가, 사회운동가, 관향=김해, 아호=소남, 법명=정광, 법호=소산 소남은 훈련원 부기를 희사하신 김정광 교도가 스스로 붙인 호이다. '남쪽의 작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낮춰 부르는 의미이다. 소남 선생은 1883년 4월 16일 완도군 고금면(고금도) 청룡리에서 완도군 창군과 완도향교 창설의 공로자이신 김광선의 6남중 2남으로 태어났다. 국운이 풍전등화처럼 위태롭고 암운이 짙은 한말, 고금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던 심제 이도재(李道宰)선생으로 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그의 주선으로 1908년 결연히 상투를 자르고 상경하여 융희학교에 입학하였다. 3년간 신학문을 수학,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대한제국 제1호로서 고금면 회룡리에 간이학교를 설립하고 후진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한인교사 강제 퇴출이 이어지고, 일본 상인배의 횡포와 폭리가 이어졌다. 그 해 8월 17일 즉시 완도읍 완도청년회 개최 석상에서 "우리 완도는 안도인의 완도이지 타인들의 완도가 아니다. 모름지기 완도인이 이를 지배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관리의 명령에만 따르지 말고 자진해서 교육과 경제 등 개량할 것은 개량하여 완도의 발전 진보를 계회해야한다"고 역설한 뒤 "완도는 타 군에 비하여 물가가 고가이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 참석한 청년회원을 중심으로 하여 완도소비조합을 조직하고 물화의 저가 공급과 이익배당을 목적으로 하여하 할것이다"고 제의하여 김태현, 이승호, 이제철 등의 동지들과 더불어 9월 1일 항일구매조합인 '완도상회'를 열고 스스로 주임이 되었다. 완도군대에 이 운동이 불길처럼 번져 나가자 급기야 일본 상인들은 영업을 포기하고 목포, 여수 증지로 떠나야만 했다. 이에 일본 경찰은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일본인 관리및 일본인을 배척하도록 선동하였다고 체포되어 11월 18일 장흥법원을 거쳐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출소후, 감옥에서 알게된 경북 상주 출신 애국지사 조태형의 권유로 상주군 낙동의 픙양조씨 제각 양진당을 개조하여 조명학교를 열고 4년간 신학문을 가르치며 계급타파와 노동정신의 함양에 노력했다. 당시 개교식에서 '양반의 머리를 해부한다'는 제목의 강연은 유명하다. 하지만 옥에서서 얻은 지병의 재발로 부득이 귀향케 되었고, 귀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