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page


373page

해암 한귀재 선생 공적비(海岩 韓貴才 先生 功績碑) 선생(先生)은 1910년 1월 29일 고(故) 승환공(昇煥公)의 장남(長男)으로 이땅에서 태어나 1980년 12월 2일 영면(永眠)하시다. 조국(祖國)이 근대화(近代化)의 여명을 맞은 1920년대에 약산학교(藥山學校)에 재학 중(在學中)이던 소년(少年) 해암(海岩)은 고(故) 박성래선생(朴成來先生) 등의 지도(指導) 아래 문맹퇴치(文盲退治) 등 계몽운동(啓蒙運動)에 활동(活動)하셨으니 선생(先生)의 사회봉사(社會奉仕)와 지도자(指導者)로서의 인격형성(人格形成)은 이때에 이루어졌으리라. 1929년에는 서울에 유학(留學)하여 고학당(苦學堂)에서 수학(修學)하셨고 이래 지하조직(地下組織)에 가담(加擔)하여 항일전선(抗日戰線)에서 활동(活動)하시다 1933년 이른바 전남협의회(全南協議會) 사건(事件)으로 3년간의 옥고(獄苦)를 치르시기도 하였다. 광복 후(光復後)에는 오직 지역개발(地域開發)에 전념(專念)하시니 지방민(地方民)들의 숙원(宿願)이었던 해동국민학교(海東國民學校)의 설립(設立), 용문교(龍門橋)의 가설(架設), 해동제(海東堤)의 축조(築造) 등 사업(事業)을 20여년(餘年)에 걸쳐 수행(修行)함에 있어 추진회장(推進會長) 등 지도적(指導的) 위치(位置)에서 인화(人和)를 기(期)하고 공정(公正)을 지표(指標)삼아 성공적(成功的)으로 마무리 짓는 데 기여(寄與)하시었다. 선생(先生)은 가난 속에서도 항상(恒常) 마음은 풍족하시었고 공정무사(公正無私) 더불어 사는 서민(庶民)의 귀감(龜鑑)이셨으니 호국애향(護國愛鄕)하신 선생(先生)의 덕(德)을 기린 동료후배(同僚後輩)들은 영면(永眠)에 즈음하여 삼가 여기 이 뜻을 새긴다. 1981년 4월 4일 애국지사(愛國志士) 고(故) 해암(海岩) 한귀재선생추모회원(韓貴在先生追慕會員) 일동(一同) 찬(撰) 청운(雲) 김용승(金龍昇) 서(書) 운암(雲菴) 조용민(趙鏞敏) 2022년 희망완도행복마을공동체주민공모사업 약산면향토문화유적정비사업 추진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