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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정남균선생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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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농업학교 재학중 1926년 11월 3일, 당시 광주 부동정(不動町) 소재 최규창(崔圭昌)의 하숙방에서 왕재일(王在一)·장재성(張載性) 등 광주고보와 농고생 15명과 함께 조국의 독립·사회과학 연구·식민지노예교육반대 등을 강령으로 하는 항일학생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였다. 동회의 운영은 월회비 10전, 매월 제1·3토요일에 모여서 민족적 교양의 함양과 사회과학을 통한 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연구하기로 정하였다. 또한 회원들은 비밀엄수, 동지포섭으로 조직확대에 힘쓰기로 하였다. 그런데 1927년 3월 회원중 이반자가 생겨 기밀누설의 위험이 있었으므로 그의 집에서 회의를 갖고 동회를 해체하였다. 그러나 동회의 해체는 형식적이었을 뿐으로 주동학생들의 활동은 계속되어 나갔다. 동년 3월 졸업 후에도 계속 모교 독서회와 연락하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독립운동 시위 후 성진회 운동과 관련하여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후 1930년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으며,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