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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면 희생자 추모비문. 1945년 8.15해방은 또 다른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미군정에 이어서 출범한 이승만정권은 1949년 여름 소안의 청.장년들이 해방 후 반군정 집회와 단독선거반대등의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이들을 법적절차도 없이 사살, 수장하는 국가폭력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주민들은 황씨문중의 산, 학교운동장, 미라공동묘지, 완도읍야산, 금일면, 신지면, 보길면 해안가등에서 무차별 사달 당하였다. 주민학살은 6.25전쟁중에도 계속되었다. 1950년 7월 군.경은 소안면 보도연맹원들을 연행해 목포인근의 바다와 신지면 앞바다에 수장하였다. 목포등 전국의 형무소에 수감중이던 다수의 소안면 민간인들도 이 무렵 희생되었다. 편안한 섬 소안은 이름과 달리 살육과 야만의 섬 킬링필드가 되었다. 이런 비극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지나도록 유족들은 통한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민주정부가 세워지고 2005년 5월에야 비로소 국가기구로 발족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2009년 2월과 8월, 2010년 5월에 완도군 민간인희생사건, 보도연맹사건, 목포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사실을 발표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규명서에서 "지금까지 유가족의 슬픔과 고통속에 살아오게 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이에 국가가 이 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혔다. 2011년 봄, 소안면 희생자 유족들은 서울에서 '추모비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2013년 5월까지 희생자 추모비를 소안면에 세우기로 결의하였다. 이 추모비는 완도군과 소안면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희생자 유족과 향우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여기에 250명의 억울한 혼령들이 잠들어 있다. 이 곳은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의 한이 용서와 화해로 승화한 평화의 마당이요 아울러 후대에 거울이 될 역사의 교육장이다. 소안면 희생자들이여! 이 땅을 굽어 살펴 평안을 주시어 부디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