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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독립운동의 역사 망국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남도의 우국지사들은 "조선에 살고 조선에 죽자"고 호소하며 대한제국 시기 의병항쟁을 주도하였다. 1896년 3월 20일. 전라도 최초의 의병이 장성에서 일어났다. 노사학파(蘆沙學派)의 대표였던 기우만은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것은 신민(臣民)의 직분'이라 천명한 후 나주와 광주 등 여러 고을의 호응을 받아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를 결성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기삼연을 비롯한 기라성같은 의병장들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결성하여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으로 전라남도 각지에 의병근거지를 구축하여 장기항전을 감행함으로써 '남도의병이 으뜸'이라 널리 알려졌다. 또한 나철 오기호 등은 자신회(自新會)를 결성하여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5적의 응징에 앞장섰으며 이들은 1909년에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하여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경술국치의 치욕을 씻기 위해 남도사람들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하고 광복회(光復會)에 가담하여 1910년 대국내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일제가 총칼로 지배한지 10년만에 우리 민족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남도 20여개 군에서도 대한독ㄹ비 만세를 부르며 조선의 독립을 열망한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일제의 지배정책이 더욱 간교해진 1920년대 후반 나주와 광주의 청년학생들이 "식민지 차별교육 철폐""조선인 본위교육" 등을 외치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메아리가 전국은 물론 해외까지 울려퍼져 최소 280개 학교의 5만 4천여 명이 호응하였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만주와 중국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까지 침략하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도사람들은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며 대동단결하여 신간회운동을 비롯한 농민.노동.여성.청년.종교운동을 전개하여 광복을 염원하였다. 1933년 황동윤 김홍배 등은 1920년 대농민운동의 전통을 혁신하여 전남운동협의회(全南運動協議會)를 결성하였다. 당시 농어민들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때까지 싸우러 나가세"와 같은 노래를 부르며 민족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활약하다 1938년에 588명이 검거되었다. 이 무렵 광주 서중학교 학생들은 무등회(無等會)를 조직하여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저항하며 조선어 사용운동을 펼이다가 1943년에 약 350명이 체포되었다. 해외에서는 중국에서 김철을 비롯한 조경한 나월환 정율성 미국에서는 서재필 등이 독립운동의 핵심인물로 활약하였다. 이처럼 남도사람들은 소안도에서 지리산까지 그리고 해외의 이역만리에서도 광복의 그날을 위해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일제와 맞서 싸운 독립의 단심(丹心)이었다. 조국의 광복은 물론 미래의 "대한민국은 아시아 동쪽에 우뚝서서 세계 만방에 기상을 떨칠 것"이라 굳게 믿으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45년 8월 15일 이 땅에서 의병을 일으킨지 꼭 50년만에 나라를 되찾ㅇㅆ다. 남도의 독립운동 영령들이시여 광복 75년이 되어서야 이 기념비를 세운 못난 후손들을 용서하시고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영원하도록 도와주소서. 2020년 광복절 홍영기 전 순천대학교 인문예술대학장 짓고 금초 정광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