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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민 의거는 청년유지 김연태와 김우현이 주동하여 동지 4인을 규합 모의하고 여래 뒷산 죽림에서 태극기와 격문을 만드는데 밤을 세웠다. 3월 31일 하오 진영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격문을 뿌리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수백 군중이 호응 시위하였다. 2차 의거는 면내 하계리 서당학도 안기호 김종만이 주동하여 학우 30여 인과 모의하고 태극기를 만들며 지역민을 동원하여 4월5일 하오 진영장터에서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니 2000여 군중이 가세하였다. 일헌의 억압 제지에 격분한 군중은 일헌분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히 대항하였다. 장유면민 의거는 김종훤이 3월 1일 고종 인산에 참지하고는 서울 의거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감추고 귀향하였다. 유지 김병태는 김용수 이경석과 상의하여 10여 동지를 규합하였고 김승태를 총지휘자로 추대하여 거사하였으며 남지역은 김용수가 전담 지휘하였다. 원동포 갈대숲에서 거듭 밀회하여 리동마다 동원책을 두어 주민을 격려케하고 태극기와 선언문을 만들었다. 4월 12일 정오 무계리 대청천변에서 농적 나팔소리를 신호로 운집한 군중은 삼천을 해아렸다.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대열은 무계장터로 행진하니 놀란 일헌은 무차별 발사하여 동지 3인이 순사하였다. 격분한 군중은 일헌분견소를 포위 파괴하고 항거하자 일헌기마대가 출동하여 해산은 되었으나 조직적이고 격렬한 항쟁을 하였다. 오지면 의거는 사립동명학교 교원 이진석이 동창 재경 유학생 김연복으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입수하고 동창 양왕석과 동지를 규합하여 태극기와 선언문을 준비하여 4월 10일 하오 오호장날 태극기를 세우고 선언문을 배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니 200여 군중이 호응하여 항거 시위하였다. 가락면에서는 진주농교 재학생 문위동의 주동으로 4월 13일 정오경 청년 20여 인이 봉림리 음지바위 아래 모여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하였다. 이 밖에도 향토 출신으로서 타 지역에서 3.1운동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선열은 다수이다. 전 기명 각 지역 의거에서 주동자는 일헌에 구속되여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기소되어 옥고를 치른 열사에 한하여 독립유공선열로 이에 기명하는 바이다. 오라 국파산하재라. 일제 식민치하 36년은 민족적 수난기요 항쟁기니 우국지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4252년 3월 20일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국권을 재정립하고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왜국의 불의를 만방에 폭로하였다. 조국광복이란 민족의 염원이 한데 뭉쳐 승화된 3.1정신과 선열의 피는 맥맥히 이어저 을유 광복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는 우리 민족와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 자에 기미운동 70주년에 즈음하여 3.1동지회 김해지부장 권영섭의 발의와 지부의 주간으로 향민의 뜻을 모아 기적비를 분성방두에 세우나니 이에 민족흥망의 감계를 찾고 3.1의거의 사실을 밝혀 의에 앞장서 살신성인하신 독립유공선열의 공적을 병기함으로써 이 고장 후손들에게 전하는 바이다. 독립유공자 김해면 배동석 임학찬 배덕수 박덕수 허병 허종식 최덕관 김석암 조병중 최계우 송세탁 송상진, 진영면 김정태 김우현 김성수 김용환 김용호, 장유면 순국자 김선오 김용이 손명조, 유공자 김승태 김종훤 김용주 이강석 조항래 조용우 최현호 김만수 안무술 이차수 정덕윤 조봉출 조용명, 오지면 이진석 박두성 심봉구 정소목 양왕석 김영두, 이북면 배치문 (목포시 의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