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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비문 민족자존의 권리와 자유평등의 대의를 밝힘은 구국제민의 의인이라 할 것이요. 한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 민족의 의불의에 달렸다 할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조국 강산과 문화유산이 이민족의 겸제로 황폐화되고 말살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중에 앞서 대국을 통찰하고 조국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은 길이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날 것이다. 단기 4252년 기미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명월관과 파고다공원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자유민임을 만방에 고함으로써 거족적인 독립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켜 근역의 방방곡곡으로 노도처럼 번져 남녀노소가 적수공권으로 일헌의 총검에 대항하니 배일적기심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동년 6월 중순까지 삼천리 전역에 확산되어 갔다. 전통과 충절의 고장 김해에서도 항일 의분심은 고조되어 3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 봉기하여 격렬한 항거가 있었으니 김해군 내의 의거개황을 열거하는 바이다. 김해면민 의거는 재경 유학생인 배동석이 서울 의거에 학생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귀향하였다. 그는 동지 6인과 거사를 모의하고 3월 30일밤 성내 중앙거리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주민 50 수인이 호응하였으며 거사는 군내 의거의 효시로서 각 면 지역으로 번져갔다. 2차 의거는 활천지구 청년 유지 허종식과 허병이 주동으로 마마리 한문서당 출입 유지들과 모의하고 서당학도 10여인이 조력하여 태극기를 판각 제작하고 지역민을 동원하여 4월 2일 하오 주모자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니 300여 군중이 호응하여 격렬히 시위하였다. 김해 면내 두 동에서는 4월 16일 하오경 부녀 50여인이 마을 뒤 칠산에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하니 일헌이 출동하여 총을 난사하니 4인이 중경상을 입었다. 진영